데이터 무제한 요금제가 아니라면 버틸 수 없는 시대다. 데이터에 대한 갈증은 직장인이 달고 사는 스트레스성 위염과도 같다. 떼려야 뗄 수 없단 소리다. ‘기본 제공 데이터를 모두 사용했다’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속이 쓰리다. 매일 ‘통신비 인하’를 외쳐대는 시민단체를 응원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나. 와이파이가 제공되는 지역을 찾아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구보씨는 결심했다.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를 사용하기로.
구보씨가 월 8만8000원에 20GB의 기본 데이터가 제공되는 SK텔레콤 ‘T시그니처 Classic’ 요금제를 선택했다. 기본 제공량 소진 시 하루 2GB를 추가로 제공받고, 이를 다 쓰면 3G(3세대 이동통신) 수준인 3메가비트(Mbps)로 속도로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다. 더 낮은 가격의 요금제도 있지만 기본 제공량이 턱없이 적은 편이다. 드라마 애청자인 구보씨는 20GB로도 목이 마르다.
구보씨는 SK텔레콤 VIP 고객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VIP 등급이 되려면 가입기간이 2~5년일 경우 전년도 납부금이 90만원 이상이어야 한다. 5년 이상 가입자라면 60만원 이상 납부했어야 한다. 통신사 가입 기간이 자격 요건에 들어가는 만큼 심사가 까다로운 편이다. 구보씨는 VIP에게 주어진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믿었다. 4대의 스마트폰을 쓰면서 한 번도 통신사를 바꾸지 않은 이유다. 미디어는 그를 ‘충성고객’이라 불렀다. 가족 구성원이 각각 다른 통신사를 이용해 가족결합 혜택은 받지 못해도 행복했다. 통신사를 변경하면 스마트폰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는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타 통신사의 8만원대 요금제가 더 좋아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신호탄은 LG유플러스가 쏘아 올렸다. 지난 3월 월정액 8만8000원(VAT 포함)에 무제한으로 LTE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는 ‘속도·용량 걱정 없는 데이터 요금제’를 출시한 것이다. 기본 데이터 제공량과 속도제한을 없앴다. 당시 SK텔레콤과 KT의 무제한 요금제는 모두 속도제한이 걸려있었다. 기본 제공량을 모두 소진할 경우 일일 LTE 추가 사용량을 제공하고, 일일 사용량마저 소진한 고객들은 3G 수준의 속도로 데이터를 이용하는 식이다.
LG유플러스가 쏘아 올린 공은 KT로 넘어갔다. 지난달 KT는 월정액 8만9000원에 데이터 제공량 및 속도제어가 전혀 없는 완전 무제한 요금제 ‘데이터ON 프리미엄’을 선보였다. ‘완전 무제한 요금제’ 경쟁에 불이 붙었다.
구보씨는 생각했다. 속도 ‘제한’이 붙은 요금제가 정말 ‘무제한’ 요금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고객들의 비판이 높아지자 SK텔레콤은 진화에 나섰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20일 열린 시카고 포럼에서 “통신 요금을 과도하게 내고 있다는 고객의 불만이 많다”며 “가장 싸게 쓸 수 있는 요금제로 고객 신뢰를 얻겠다”고 말했다. 고객 수요를 반영해 저렴한 요금제를 출시하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SK텔레콤은 실질적인 혜택 확대를 위해 멤버십 서비스를 손질했다. 고객 등급별로 차등 지급했던 멤버십 포인트 제도를 없앴다. 모든 고객이 무제한으로 멤버십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다만 일일 사용 횟수에 제한을 걸었다.
고객 혜택을 늘리겠다던 SK텔레콤은 되려 구보씨의 혜택을 축소했다. VIP였던 구보씨는 해마다 무제한의 멤버십 포인트를 제공 받았다. 사용 횟수 제한도 당연히 없었다. 구보씨는 전자책 서비스 플랫폼 ‘원스토어 북스’ 20% 할인 혜택을 쏠쏠하게 즐겨왔지만, 이제 하루에 5번밖에 할인받을 수 없게 됐다. 횟수가 정해져 있으므로 가장 비싼 책에만 할인 혜택을 적용해야 한다. 실수로 100원짜리 연재물에 할인 혜택을 제공받는 바람에 4000원짜리 책은 정가로 결제해야 했다.
통신사를 변경할 수도 없다. 위약금은 구보씨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약 1년을 SK텔레콤과 함께해야 한다. 선택약정할인 기간이 끝나도 SK텔레콤 고객으로 남게 될까? 구보씨는 장담할 수 없었다. 문득 온라인에서 유명한 드라마 대사가 생각났다. “이보시오, 의사 양반. 내가 호갱이라니!”
이승희 기자 aga445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