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과 주름’ ‘작은 키’ ‘살집 있는 몸매’
지난해 런웨이에 등장한 색다른 풍경은 관중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수많은 디자이너가 ‘젊지 않고, 마르지 않고, 키가 크지 않은’ 모델에 작품을 입혀 선보였기 때문이다. 다양함이라는 트렌드는 곧 시중에도 퍼져나갔다. 나이키 등 여러 브랜드는 체격이 큰 사람들을 위한 ‘플러스 사이즈’를 출시했고, 뱃살과 팔뚝살 등 ‘현실 몸매’를 구현한 마네킹을 매장에 도입했다.
그러나 국내 패션업계는 이러한 트렌드를 따라가기에 아직 역부족인 모양새다. 한국 대표 SPA 브랜드 ‘스파오’(SPAO), ‘에잇세컨즈’(8seconds), ‘탑텐’(TOPTEN) 여성 상의 사이즈는 3단으로 제작돼, 해외 패션 브랜드에 비해 상당히 제한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스파오 공식 판매 사이트에 게재된 사이즈표에 따르면 스파오 여성 셔츠 상의 사이즈는 ‘S(Small), M(Medium), L(Large)’ 단 세 가지뿐이다. 지난 6월, 일반인 모델 콘테스트에서 플러스사이즈 모델을 뽑아 화제를 모았던 에잇세컨즈도 여성 셔츠 사이즈는 ‘S, M, L’로 상황은 비슷했다. 유니섹스를 지향한다는 탑텐은 전체 의류 중 30% 가량을 차지하는 여성복에서 상의 사이즈를 ‘85, 90, 95’로 제작하고 있었다.
이유는 ‘재고 관리’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공통으로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을 이끌어가고 있는 SPA 브랜드에서 재고처리는 기획·생산만큼 중요하다고 답변했다. 재고를 남기지 않기 위해 가장 보편적인 사이즈를 생산해 판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외 SPA 브랜드 사정은 다르다. 스웨덴 SPA 브랜드 ‘에이치엔엠’(H&M) 공식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매할 수 있는 여성 상의 사이즈 종류는 ‘32, 34, 36, 38, 40, 42, 44, 46, 48, 50’ 등 최대 10가지다. 에이치엔엠 관계자는 “평균적으로 XS, S, M ,L, XL, XXL 등 6단 사이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에이치엔엠은 ‘P’(Petit) 사이즈 제도를 운영해 좀 더 작은 사이즈도 함께 생산하고 있다. 스페인 브랜드 ‘자라’(ZARA)는 XS, S, M, L, XL 등 다섯 종류 사이즈의 여성 상의를 판매하고 있다.
국내 SPA 브랜드에서도 사이즈를 다양화하려는 움직임은 있다. 탑텐 관계자는 “추구하는 스타일에 따라 다양한 사이즈 옷을 사려는 젊은 여성들이 많아졌다. 또 기존 고객 층이 젊은 세대였다면 내년에는 20~40대로 늘릴 계획”이라며 “2020년부터 여성복 라인 사이즈를 총 4단으로 운영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제한적인 여성복 사이즈는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여성사회단체 관계자는 여성들이 몸매에 대한 ‘강박’을 경험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안현진 여성환경연대 활동가는 “옷이 맞지 않으면 ‘살 쪘나봐’ ‘살 빼야겠다’ 등 내 몸이 정상이 아닌가라는 고민을 일반적으로 하게 된다”며 “사이즈가 다양하지 않은 매장을 이상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안현진 활동가는 “브랜드들은 수익성 때문에 이렇게 공급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이즈별로 판매량이 공개된 적은 없다”며 “자신들이 생산하고 있는 사이즈가 사회에 어떠한 메시지를 던지는지 이제는 의류 업체도 고민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신민경 기자 smk503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