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소연 기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광범위한 신체적 질환은 물론 정신건강 문제도 겪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8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중구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대회의실에서 ‘가습기살균제 전체 피해가정 대상 첫 조사결과 발표 기자회견’이 열렸다. 한국역학회는 특조위로부터 의뢰받아 지난해 6월13일부터 12월20일까지 전체 가습기살균제 피해가정 4953가구 중 조사에 동의한 1152가구를 대상으로 설문·심층조사를 진행했다. 전체 피해자 6950명 중 13.2%에 달하는 873명(성인 637명, 아동·청소년 236명)이 참여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 기준,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이후 극단적 선택을 생각했다는 비율이 49.4%에 달했다. 극단적 시도를 했다는 응답은 11%였다. 이는 일반 인구에 비해 3배 이상 높은 매우 심각한 정신건강 고위험 상황이다. 우울·의욕저하·불안·긴장 72%, 집중력·기억력 저해 71.2%, 불면 66%, 분노 64.5%, 죄책·자책감 62.6%, 소진·탈진 37.9%로 집계됐다.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아동·청소년도 정신건강 문제를 겪었다. 극단적 생각 또는 극단적 시도를 한 적 있다는 응답이 각각 15.9%와 4.4%였다. 집중력·기억력저하 44.4%, 불안·긴장 42.5%, 분노 36.2%, 우울 34.3% 순이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겪는 ‘울분’도 심각했다. 10명 중 약 8명은 ‘지속되는 울분’ 혹은 ‘극심한 울분’을 앓고 있었다. 성인 피해자의 50.1%는 극심한 울분 상태였다. 이는 동일한 문항을 적용한 국내외 어느 문헌에서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심각한 수준으로 전해졌다. 일반인의 경우, 극심한 울분은 10.7% 수준이다.
가습기살균제 노출 이후 다양한 신체건강 피해를 호소한다는 결과도 있었다. 성인의 경우, 폐질환 83%, 비염 등 비질환 71%, 피부질환 56.6%, 안과질환 47.1%, 위염·궤양 46.7%, 심혈관계 질환 42.2%, 내분비계 질환 21.3%, 신장질환 15.3%, 간질환 9.9%, 암질환 5.4% 순이었다. 이중 정부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인정하는 질환은 폐질환과 독성간염, 간질성 폐질환, 비염 등 동반질환 등에 그친다.
임종한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호흡기 질환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질환이 발생할 수 있다”며 “(가습기살균제 유해물질이) 우리 몸속에 흡입되면 상기도 비점막을 통과해 안구 쪽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흡입된 물질이 장기 쪽으로 넘어가 노인들의 경우에는 심혈관이나 내분비기관 문제로, 아이들의 경우에는 발달장애·과잉행동장애 등 신경계 손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증상이 발현되지 않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의 수가 4만명 수준이라는 진단도 있었다. 이른바 ‘가습기살균제 세대’를 지속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나이가 들면서 여러 질환이 촉발될 가능성이 있다”며 “지금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그 수가 많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신체적·정신적 문제로 고통받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삶의 질 점수는 어떨까. 성인 피해자 기준, 행복감은 10점 만점에 4.05점에 불과했다. 삶의 질은 10점 만점에 3.99점으로 조사됐다. 지난 2015년 기준 서울시민의 행복감은 6.97점이다. 지난 2017년 기준 일반 국민의 삶의 질 점수는 6.33점으로 집계됐다.
조사를 진행한 유명순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교수는 “피해자들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에 대해 ‘부당하다’, ‘고통스럽다’ 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며 “협소한 폐질환 치유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 피해 대응’ 체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별법 통과와 적극적인 대책 마련 등 국회와 정부에 대한 피해자의 호소도 나왔다. 휴대용산소발생기를 짊어진 채 마이크를 잡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서영철(62)씨는 “지난 2011년 천식 진단을 받았다. 당시에는 의사도 근거를 찾지 못했다”며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병을 얻었지만 그에 대한 대책을 아무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회견에 참석한 가습기살균제 피해 아동 어머니를 가리키며 “어머니들은 본인들을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들을 죄인으로 살지 않도록 정부가 나서서 도와달라”고 이야기했다.
다만 소란도 있었다. 박혜정 가습기살균제 환경노출확인피해자연합 대표가 특정 단체와 친한 피해자들에게만 기자회견 초청, 가습기살균제 피해 인정 등의 특혜를 준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박 대표와 서씨 간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에 황전원 특조위 지원소위원회 위원장은 “정부의 피해 인정 범위가 협소하다 보니 불만을 토로하는 피해자들이 굉장히 많다”며 정부의 제도 개선을 재차 촉구했다.
지난 1994년 유독물질이 함유된 가습기살균제 제품이 출시됐다. 지난 2011년 판매 중지 처분이 내려질 때까지 유독물질에 노출된 피해자가 다수 발생했다. 지난달 31일 기준, 공식적인 가습기살균제 피해인정신청자는 6730명이다. 신청자 중 사망자는 1,523명에 달한다.
soyeon@kukinews.com / 사진=박태현 기자 pth@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