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승훈 대성중학교 교장, 한국화 화가
카유보트(1848~1894)는 1848년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마셜 카유보트는 군수물자 사업을 하던 집안의 상속자이자 동시에 상업법원의 판사였다. 구스타브 카유보트는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부유했고 파리지앵으로 살았다. 인상주의 작품 수집가로 유명하였지만 그림에 재능이 있어 부와 능력을 다 가진 화가였다.
발코니에서 거리를 보거나 창밖을 주시하는 그림을 자주 그렸던 구스타브 카유보트. 스냅사진 같은 그림이기에 더욱 친근한 작품이다. 특히 나에게 주목을 이끈 작품은 창가에서 바라본 시가지 풍경이었다. 인물이 사선으로 내려 보고 있는 풍경은 요즘 들어서 눈에 띄는 구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발코니에서 인물이 시가를 내려 보고 있기에 요즘 코로나19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자가격리된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작품으로 창가의 젊은이(1875)와 6층에서 내려 본 알레비 거리(1878), 발코니(1880), 위에서 내려 본 풍경(1880), 눈 내린 오스만 대로(1880) 등은 슬픔을 지닌 모습이다. 19세기 파리는 오스만에 의해 도시개발이 된 모습이 인상주의 화가 눈으로 표현되었다. 스냅사진으로 SNS에 올려지는 현상으로 말이다. 더더구나 카유보트의 눈에 비친 것은 산업화로 되어 가는 도시의 이미지였다. 퐁네프 다리와 철교를 그렸으며 중산층과 노동계급 모습을 그렸다.
‘발코니’ 작품은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콧수염이 있는 얼굴에 실크 해트를 쓰고 코트를 입었다. 남자들은 실용적 의상으로 편안한 옷차림으로 변모한 모습이다. 긴바지에 흰 셔츠를 선호했고, 검정과 회색, 진청색과 밤색 등 어두운색으로 유행하지 않는 색을 좋아했던 시절이다. 도시는 정비되기 전에는 비 오는 날은 도로에 거닐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오물과 오수가 길로 흐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로는 하수처리시설이 들어오고 가로등과 가로수가 정비되어 4월의 어느 날 밝은 빛이 충만하고 나른한 날이기도 하다. 플라타너스 가로수 밑을 유심히 보는 인물은 지나가는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듯하다. 화가는 건물의 특징, 새로운 방향에서 바라다본 건물을 잘 그렸다. 그는 대담한 원근법 채용과 드라마 장면 같은 세심함이 보인다. 카유보트가 32살에 그린 발코니 그림은 1880년도이다. 그는 패기가 있었기에 풍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세밀하고 파격적 구도로 그렸다. 순간의 빛을 포착한 풍경화를 그리는 인상주의에서 벗어난 신호탄이기도 했다. 새로운 시각으로 인상주의 후기가 시작되었다. 신인상주의 쇠라와 시냐크에 의해 색채분할 법으로 그림을 그렸고 고갱과 세잔, 고흐가 현대 회화의 바탕을 이루어 나간 것이다.
‘발코니’ 작품은 사회 변화를 암시하는 듯하다. 접촉이 많아지는 도시 생활에서 조금은 떨어져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인물이 오늘날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해준다. 유럽에 코로나19가 확산 중일 때 집안에서 생활하는 시민들에게 답답함을 풀어줄 묘안으로 발코니에 나와서 음악회를 즐기는 모습이 TV에 비추어졌었다. 한동안 소통의 공간이 된 것이다.
접촉하면 옮는 것이 바이러스이다. 그동안 감염병으로 혼란에 빠뜨린 바이러스는 현대에 올수록 자주 발생했다. 14세기 흑사병, 15세기 유럽인들이 신대륙으로 진출하면서 천연두가 아메리카로 상륙했고, 19세기 결핵은 침방울로 전파되었으며, 발진티푸스가 그랬고, 1910년 중국 만주에서 시작된 독감이 스페인 신문에 보도된 이후 스페인독감이라 하였는데 이 또한 그랬다. 20세기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 증후군)는 물론 사스(2003,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와 신종플루(2009, 신종 인플루엔자), 에볼라 바이러스(2014), 메르스 코로나(2015, 중동호흡기증후군), 지카 바이러스(2015), 최근 코로나19 등이 사람 간 접촉으로 전파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미증유의 바이러스가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기에 감염 예방 당국에서는 사람 간 접촉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육안으로도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 의해 공격당하는 인간은 아직 위험함을 모르고 지낸다. 너무나 군중이 모이고 접촉하는 가운데 자아 신념은 없고 권력 단체를 보여주는 힘만이 남는 세상이 되었다. 집단 이기주의를 만들어가는 세상이 두렵게 되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생활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과 같다. 냉정하면서도 마음으로 정을 이어주는 사회가 옳은 것인지 모른다. 책은 읽을 수 있으나 책은 읽지 않아 신문맹이 되었고 SNS에 맹목적이고 종교에 맹목적이며 물질문명을 추구하는 사회구조와 교육구조에 빠져버리고 이념에 맹목적인 현대에 살고 있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성찰하면서 느린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지구상에 존재할 사명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