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걸, 멕시칸 걸, 여우 같은 걸”

“라틴 걸, 멕시칸 걸, 여우 같은 걸”

“라틴 걸, 멕시칸 걸, 여우 같은 걸”

기사승인 2020-07-17 07:00:15
▲ 그룹 제국의 아이들 '마젤토브' 뮤직비디오 화면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세상은 넓고 걸(girl)들은 많다. 그룹 제국의 아이들은 2011년 발표한 데뷔곡 ‘마젤토브’에서 “라틴 걸, 멕시칸 걸, 코리안 걸, 재팬 걸”을 차례로 호명했다. 이들이 왜 세계 각국의 “걸”들을 목놓아 부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재팬 걸”의 올바른 표기는 사실 “재패니즈 걸”이라는 사실 따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룹 유키스는 2009년 내놓은 ‘만만하니’에선 내게 뜨거운 사랑을 주었으면 하는 “베이비 걸”, 하지만 차가운 손길만을 주는 “배드 걸”, 나를 약 올리고 또 약 올리는 “크레이지 걸”, 그리고 사랑 갖고 장난하는 “여우 같은 걸”이 나온다. 묘사된 네 명의 ‘걸’들이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도 놀랍지만, 상대를 ‘미친 소녀’라고 힐난해놓고도 그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듯한 화자의 태도만큼 놀라운 것은 없다.

지난 몇 년간 유튜브의 영향력이 높아지면서, 시공을 넘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곡을 ‘디깅’(발굴)하는 움직임은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그런데 이 유튜브라는 거대한 광산에서 뜻밖의 금덩이가 채굴됐으니, 바로 가수 비의 ‘깡’이었다. ‘깡’은 ‘시무 12조’를 만들었고, ‘깡’을 들으면 웬만한 곡은 좋게 들린다는 의미에서 “K팝의 백신이자 예방접종”이 됐으며, 급기야는 “세계 최초 댓글 보러 자꾸 찾게 되는 음악”의 자리에 올랐다. 이쯤 되면 누리꾼들이 발견한 것은 ‘깡’인지 아니면 자신의 ‘드립력’인지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중요한 것은 ‘깡’의 뮤직비디오와 무대를 보며 다른 이를 웃길 수 있는 댓글을 써내는 것이다. 발 빠른 채널들은 재밌는 댓글들을 모아 영상으로 제작했다. ‘sake B’ 채널이 만든 ‘[무대화면 버전] 비 깡 레전드 댓글 모음집 1탄’은 386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자랑하고 있다.

▲ 유키스 '시끄러!!' 뮤직비디오 화면
비는 MBC ‘놀면 뭐하니?’에서 ‘깡’ 신드롬이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자신의 과거 명곡들과 무대를 소개하는 창구가 되어 좋다고 말했지만, 사실 알고리즘이 누리꾼을 이끈 곳은 유키스의 ‘시끄러!!’였고, 틴탑의 ‘향수 뿌리지 마’였으며, 제국의 아이들의 ‘마젤토브’였다. 의미를 알 수 없거나 막장 드라마 한편을 압축해놓은 듯한 가사,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전자음 등 K팝의 반미학적 요소를 총집합시켜놓은 듯한 세 곡은 즉각 누리꾼들의 새로운 놀잇감이 됐다. “여기서 가장 시끄러운 건 유키스”(‘시끄러!!’) “세상 상큼하게 부르는데 가사 인성 터지는 노래”(‘향수 뿌리지 마’), “500년 후 국어영역 고전문학 역대급 킬러 지문각”(‘마젤토브’) 같은 ‘드립’이 경쟁적으로 이어지며 세 곡의 화제성에 불을 붙였고, 마침내 2020년 아이돌 시장을 유키스와 틴탑과 제국의 아이들 3파전으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주류 시장의 아이돌 그룹들이 복잡하고 거대한 세계관을 만들어내 팬들을 콘텐츠에 참여시킨다. 반면 ‘마젤토브’ 등을 발굴해낸 밈 문화는 소비자의 능동적인 참여 자체가 새로운 콘텐츠가 된다. 1~2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흐름이다. ‘향수 뿌리지 마’처럼 멤버들 간의 극단적인 파트 불균형이나 ‘시끄러!!’ 뮤직비디오처럼 맥락 없이 그럴듯한 이미지를 때려 넣은 콘텐츠 등 K팝의 ‘흑역사’가 댓글 놀이를 통해 고발되는 효과도 있다. 한편 밈 현상은 전통적인 거대 매체 종사자들에겐 일종의 경고음을 울린다. 스브스뉴스의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은 이미 2년 전 ‘마젤토브’의 작곡가를 인터뷰하고, 지난해 ‘숨듣명(숨어 듣는 명곡) 몰아보기’를 제작하는 등 밈 현상을 예견하는 듯한 콘텐츠를 선보였다. 반면 방송 프로그램 가운데선 그나마 ‘놀면 뭐하니?’가 ‘깡 열풍’의 막차를 탔을 뿐이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나고 자란 세대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기획사나 방송사가 문화적 흐름을 지배하거나 설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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