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킹덤’ - 중전 계비(김혜준)
“그 하찮았던 계집아이가 이제 모든 것을 가질 것입니다.” 한 마디가 모든 걸 바꿨다. ‘킹덤’ 시즌2에서 중전이 내뱉은 이 대사는 잠들어 있던 전국의 K-장녀를 깨어나게 한 선언이었다. ‘킹덤’은 왕좌에 오르려는 조학주(류승룡)의 욕망과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려는 세장 이창(주지훈)의 욕망이 부딪히는 드라마다. 남성들의 권력 암투를 깬 건 오랜 세월 아버지에게 무시당하고 이용당하면서도 복종해야 했던 중전 계비였다. 여성이 악행을 저지를 힘도 없는 시대라고 믿게 한 함정에 많은 시청자들이 휘청댔다. 결국 비극으로 끝났지만, 분명한 문장으로 제 목소리를 내고 왕좌에 앉은 중전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K-장녀가 하나의 장르가 된다면 그 기원은 ‘킹덤’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 영화 ‘결백’ - 안정인(신혜선)
영화 ‘결백’은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막걸리 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영화인 동시에 K-장녀 안정인의 고군분투를 다룬 영화다. 치매에 걸린 엄마 화자(배종옥)와 비밀을 감추는 추인회 시장(허준호)의 서사가 전면에 나섰지만, 뒤에서 묵묵히 사건을 들여다보고 해결하는 건 정인의 몫이다. 정인이 K-장녀가 아니었다면 개연성이 성립되지 않았을 영화다.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정인을 곧바로 고향으로 가게 한 건 엄마 화자의 구속 장면이었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홀로 이리저리 뛰고 아버지 친구들로 구성된 남성연대와 암투를 벌이는 정인을 움직이는 건 가족을 위기에서 구하고 돌봐야 한다는 K-장녀의 본능이다. 정인에겐 과거에 아버지에게 당한 폭력과 그로 인한 상처를 구원받을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K-장녀의 고단하고 불우한 삶, 그리고 아무도 그를 이해하거나 챙겨주지 않는 현실을 반영한 영화다.
■ 영화 ‘야구소녀’ - 주수인(이주영)
‘결백’이 이미 세상을 다 알아버린 K-장녀의 마지막 ‘뒷수습 고생담’이라면, ‘야구소녀’는 ‘K-장녀 비긴즈’에 가깝다. ‘야구소녀’는 개인의 욕망과 성취를 멈출 생각이 없는 주수인이 당연하게 장녀 역할을 요구하는 가족, 당연하게 야구선수가 아닌 여성으로 바라보는 사회와 동시에 갈등을 겪는 이야기를 그렸다. 극 중 주수인의 선택은 두 가지. 되도록 집 밖에 있는 것, 그리고 신체적 한계를 극복할 무기를 연습하는 것이다. 홀로 사회의 편견과 맞서 싸우는 ‘천재 야구소녀’에게 장녀라는 정체성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K-장녀가 얼마나 많은 것과 싸워야 하는지, 개인의 욕망과 정체성을 왜 드러내기 힘든지 보여주는 교본 같은 영화다.
■ tvN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 김은주(추자현)
두 딸과 막내 남동생으로 구성된 삼남매를 다룬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는 첫째 딸 김은주를 통해 가부장제의 요구를 완전히 수용한 K-장녀의 최종진화 형태를 보여준다. 암묵적으로 사회적인 성공을 요구받고 매사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모습, 부모에게 공감하는 걸 넘어 부모의 역할까지 해내는 모습 등 김은주의 캐릭터에 많은 장녀들이 공감했다. ‘가족입니다’의 가족들은 김은주의 캐릭터를 사회가 만들어낸 장녀 캐릭터 대신, 개인의 캐릭터로 받아들인다. 김은주는 가족 내 역할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을 알고 그것마저 책임을 지는 K-장녀의 화신 같은 존재다. 완성형의 ‘엘리트 K-장녀’가 현실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TV를 켜고 ‘가족입니다’를 다시보기로 재생해 보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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