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MBC ‘나 혼자 산다’가 처음부터 정규 프로그램이었던 건 아니다. 2013년 2월 설날 특집으로 방송된 파일럿 프로그램의 제목은 ‘남자가 혼자 살 때’. 이 프로그램은 한 달 후 ‘나 혼자 산다’라는 새 제목으로 정규 방송을 시작했다. 여성 출연자의 등장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 결정은 적중했다. ‘나 혼자 산다’는 빠르게 MBC 대표 예능프로그램으로 성장하며 팬덤을 모았다. 350회차를 넘기며 이제 8주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나 혼자 산다’를 검색하면 “독신 남녀와 1인 가정이 늘어나는 세태를 반영해 혼자 사는 유명인들의 일상을 관찰 카메라 형태로 담은 다큐멘터리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프로그램 설명이 나온다. 앞부분엔 내용을, 뒷부분엔 형식을 설명한다. ‘독신 남녀와 1인 가정이 늘어나는 세태’라는 설명엔 2013년의 관점이 녹아있다. 당시엔 혼자 사는 게 임시적인 상황이고 어딘가 부족한 것처럼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남자에겐 여자 친구가 생기거나 결혼해야 할 것 같고, 외국에 있는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기러기 아빠에겐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 혼자 산다’는 당시의 정서에 반발하는 나름대로 과감한 프로그램이었다. 출연자들은 타인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서로를 놀리기 쉬운 지점이기도 했다. 웃음이 나오는 걸 애써 참으며 자신들을 긍정하고 서로 힘을 불어넣어줬다. ‘무지개’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었고 서로 ‘회원님’이라고 부르며 수평적 관계를 유지했다. 마이너임을 알고 있는 이들이 애써 메이저인 것처럼 포장하는 일곱 남자들의 모습은 ‘무한도전’의 새로운 버전처럼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일상을 관찰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촬영 기법과 그걸 스튜디오에서 함께 지켜보는 방송 구도는 ‘관찰 예능’ 장르로 보편화 됐다. 각자의 분야에서 멋지게 활약하던 유명인들이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게 보일 정도인 일상의 민낯을 그대로 공개했다. 누군가의 집과 일상을 구경하면서 공감하고 웃고 떠드는 구도는 하나의 관찰 예능 문법이 됐다. 대중에게 낯선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은 쉽게 친숙한 이미지를 획득했다. 시청자는 그들에게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는 새로운 재미를 찾았다. 여전히 많은 유명인들이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하고 싶다고 자처하는 이유다.
형식은 그대로지만 내용이 조금씩 바뀌었다. 더 이상 혼자 사는 건 웃기거나 억지로 긍정해야 할 일이 아니게 됐다. 연애와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것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변했다. ‘나 혼자 산다’가 무지개 라이브를 시작하며 여러 게스트의 일상을 보여주고, 여성 회원을 영입하기 시작한 것 역시 큰 전환점이었다. 고정 회원의 경계가 느슨해지며 새로운 회원을 받아들일 여지를 만들었다. 누군가의 낯선 일상을 봐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응원했다. 혼자 사는 이들이 함께 있을 때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프로그램은 ‘혼자 사는 남성’의 삶에서 ‘나’의 삶으로 조금씩 초점을 옮겨갔다.
다양한 삶의 형태를 보여주는 ‘나 혼자 산다’에 웹툰 작가 기안84가 합류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프로그램 내에서 기안84는 자신의 영역에서 일은 잘하지만, 어딘가 부족해서 챙겨줘야 할 것 같은 평범한 30대 남성의 상징으로 소비된다. 지난 14일 방송에서 배우 곽도원이 ‘기안84 10년 후 모습’이라고 불렸던 것처럼,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게스트가 등장하면 그는 순식간에 주인공의 자리에 오른다. 유아인처럼 비슷하지 않은 남성 게스트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을 찾아내는 이상한 습성을 보여주는 것도 그의 캐릭터가 됐다. 처음엔 단순한 기행으로 비쳤던 기안84이 첫 출연 후 4년이 지난 지금까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점은 일종의 진정성처럼 포장되기도 한다. 그가 어떤 엉뚱한 말과 행동을 해도 동료 무지개 회원들은 재미있는 상황으로 포장하거나 감싸고 위로한다. 과거 여러 논란에서도 이 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기안84의 방어막이 되어주는 다양성은 다른 회원들과 조금 결이 다르다. 다른 회원들의 일상이 혼자 사는 삶의 폭을 넓혀준다면, 기안84는 시대 역행에 가깝다. 사실상 기안84는 2013년 ‘남자가 혼자 살 때’의 정서에 머물러 있는 유일한 ‘나 혼자 산다’ 회원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바뀐 세상을 받아들이는 다른 남자 회원들에 비해 기안84의 적응력은 눈에 띄게 떨어진다. 회원들이 기안84를 보듬어주고 긍정해주는 과정이 웃음코드로 나타나는 건 ‘나 혼자 산다’ 초창기와 같은 맥락이다. 그가 2000년 방송된 200부작 KBS2 ‘태조 왕건’을 세 번이나 돌려봤다는 일화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여전히 ‘나 혼자 산다’는 국내 예능을 대표하는 프로그램이다. 혼자 사는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긍정하는 것이 의미 있는 지향점이라는 건 아직 유효하다. 최근 장도연과 한혜연, 박세리 등 여성 출연자의 삶을 여러 각도로 조명하고 새롭게 발굴하는 것 역시 프로그램을 한층 흥미롭게 만들었다. 제목과 콘셉트가 바꾸며 ‘나 혼자 산다’는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해왔다. 기안84의 하차를 둘러싼 지금의 상황이 제작진에겐 냉혹한 시험처럼 느껴질 수도, 변화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제 선택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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