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만씨의 아들 동균이는 지난 2016년 5월7일 다니던 회사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극단적 선택이었다. 장례식에 온 친구들은 “동균이가 아니었으면 다른 사람이 죽었을 것”이라고 눈물을 훔쳤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꽃과 건강식품이 있었다. 동균이가 보낸 어버이날 선물이었다. 김씨는 아들의 죽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휴대폰 기록을 떼어보고 회사를 찾아갔다. 김씨는 동균이가 자신과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씨는 1980년 인천의 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자통신 분야에 특화된 학교였다. 90% 이상의 학생들이 통신 분야로 취업했다. 김씨도 3학년2학기부터 한국통신(현 KT) 전신전화국으로 실습을 나갔다. 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같은 일을 했다. 군 제대 후에도 어려움은 없었다. 김씨는 옛 직장 대신 삼성전자를 택했다. 몇 번의 이직을 거쳤지만, 전자통신 분야를 떠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배운 전공은 중년이 돼서도 유용했다.
동균이는 어땠을까. 동균이는 지난 2016년 2월 경기 군포의 한 특성화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자상거래를 전공했다. 김씨는 특성화고 진학을 만류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었다. 동균이는 컴퓨터를 다루는 직업을 갖고 싶어 했다.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길 좋아했다. 싱크대 물 튐 방지 장치를 고안해 실용신안을 등록했다. 방학을 반납하고 공부했다. 자격증을 5개나 취득했다.
노력은 무용지물이 됐다. 교사는 동균이에게 경기 성남의 한 외식업체에 취업할 것을 권했다. “연봉이 대기업 수준”이라고 말하며 유명 요리사의 성공담을 풀어댔다. 동균이는 “가고 싶지 않다”고 김씨에게 말했다. 교사의 설득이 이어졌다. 동균이는 고등학교 3학년인 2015년 11월부터 외식업체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했다.
동균이는 종일 지하에서 스프를 만들어 위층으로 날랐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커다랗고 뜨거운 스프통을 젓는 일은 고됐다. ‘오픈·마감’ 벌칙도 동균이를 괴롭게 한 일 중 하나였다. 근무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실수하면 한두 시간 더 일 해야 했다. 퇴근이 늦어지면 집으로 돌아갈 길이 없었다. 회사 락카룸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괴로웠다. 학교는 현장실습생이 되돌아오는 걸 바라지 않는다. 취업률이 낮아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교사도 힘들게 뚫은 취업처였다. 현장실습생이 그만두면 후배는 취업하기 어려워진다.
죽음의 이유는 팔수록 선명해졌다. 김씨는 현장실습 중 사망한 또 다른 학생들의 유가족을 만났다. 사연은 각각 달랐지만 비슷했다. 특성화고에서 애견미용을 배웠던 홍수연양은 콜센터 업무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다 세상을 등졌다. 원예를 전공한 이민호군은 생수업체에서 일하다 사고로 숨졌다. 김동준군은 선임들로부터 가혹한 폭행을 당했다. 아이들의 죽음 이후 몇 차례 제도가 개선됐다. 김씨는 근본적인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고개를 저었다.
동균이의 죽음 이후, 김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30여년 만에 직업을 바꿨다. 동균이가 신었던 신발을 신고 마트에서 상하차 일을 한다. 하루에 14시간씩 커다란 짐을 나른다. 고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들 생각이 나서 버틸 수 없다.
김씨는 “경제적인 생태계나 환경이 바뀌었지만 직업계고 정책은 40년 전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현장실습 문제에 대해 너무 몰랐다. 나를 용서할 수 없다”는 김씨는 아들의 운동화를 신고 일터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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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이희정 디자이너
영상 제작=우동열 PD, 촬영=김해성·이승주 영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