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문대찬 기자 =리그 오브 레전드(LoL) 젠지e스포츠 게임단에는 금발의 연습생이 있다. 프랑스 출신의 22살의 청년 앤서니 바지르(Anthony Bazire)다. 그는 2019년 트라이 아웃을 통해 젠지 글로벌 아카데미(GGA) 학생이 됐고, 지난해 8월부터는 연습생 신분으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지난달 30일 강남에 위치한 젠지 사옥에서 앤서니를 만나 인터뷰를 할 기회를 얻었다. 막힘없이 장문의 답변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걸어온 길에 동반된 수많은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비록 타국의 언어였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를 통해 그의 가치관, 신념 등이 오롯이 전달됐다. 프랑스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은 어느덧 희미해지고, ‘선수 앤서니’가 더욱 궁금해졌다.
앤서니는 챌린저스코리아(2부리그)에서 활약했던 ‘LS’와 ‘말리스’의 사례를 접한 뒤 한국행을 결심했다. 문화와 언어 등에 차이가 있지만, 유럽보다 뛰어난 수준을 가진 한국 리그에 마음이 끌렸다.
“라이엇이 시즌 9부터 솔로랭크의 방식을 변경한 뒤로 (유럽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저도 게임을 즐기지 못했고요. 트위터에서 공고를 보고 젠지 아카데미에서 도전을 하게 됐어요. 기회를 잡아 여기까지 와서 지금까진 아무런 후회도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좋은 선택이었어요. 젠지가 기회를 줬고, 여기서 선수로서 성장할 수 있는 것에 매우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에요.”
“한국을 간다고 했을 때 주변 친구들은 제가 ‘휴가를 간다’, ‘놀러간다’ 이 정도로 생각했어요(웃음). 부모님은 처음엔 의심걱정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 결정을 지원해주셨고, 코치님들과 화상 회의를 한 뒤로는 열심히 응원해주셨어요. 이제는 제 든든한 조력자에요.”
“프랑스와 한국의 제일 큰 차이점은 연습 문화나 환경, 스케줄 같은 것들이에요. 여기서는 12시 정도에 일어나서 새벽 3시까지 연습을 해요. 식사, 자유시간이 있긴 하지만 훨씬 더 힘들어요.”
앤서니는 한국 생활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으로 솔로랭크의 수준을 꼽았다.
“유럽 선수들보다 한국에 있는 유저들이 전체적으로 다재다능해요. 모난 부분이 없고 기술적으로나 운영적으로나 크게 부족한 부분 없이 잘하는 느낌이에요. 전반적으로 실력 차이가 어느 정도는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한국에서 마스터 티어를 찍은 유저는 거기서는 충분히 그랜드마스터나 챌린저를 달 수 있어요. 유럽에서 마스터를 찍던 유저는 한국에서는 다이아2나 다이아3 정도 된다고 할까요. 그래도 유럽 탑 50위권은 충분히 한국에서도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타 프로스포츠의 외국인 선수들처럼, 앤서니도 처음엔 음식 적응에 애를 먹었다. “전 사실 편식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웃음). 싫어하는 건 정말 싫어하고 맛없을 것 같은 건 꺼려요. 그리고 매운 음식을 잘 못 먹어서 그런 건 최대한 피하려고 해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소나 돼지, 닭, 양 같은 고기류는 잘 먹어요. 현재까진 그런대로 적응을 잘 한 것 같아요.”
8개월째 한국에서 생활 중인 앤서니는 한국말엔 아직 서툴다. 간단한 의사소통만 가능한 정도다. 할 줄 아는 한국말을 해달라고 요청하니 딱딱하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나 이름이 앤서니에요. 나는 스물두 살. 프랑스 사람입니다.”
하지만 앤서니는 게임 내에서 선수들과의 의사소통엔 전혀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생활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모르는 게 많아요. 기본적인 숫자나 인사말, 자기소개는 가능한데 일상 생활적인 부분은 배워야 할 게 많아요. 하지만 게임에선 초반부터 끝까지 오더 등을 할 정도로 충분해요.”
앤서니는 학생 신분일 때는 하루 6~7시간씩 한국말을 배우기도 했다. 지금은 실력 향상이 우선이라 생각해 미뤄뒀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기량이 올라오면 다시 공부를 시작할 생각이다.
“지금은 게임적인 부분에 집중을 많이 하고 있어요. 실력 향상에 집중해야 될 때라고 생각해요. 2개월에서 6개월 정도 열심히 연습하면 원하는 수준까지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되면, 그 때부터 하루에 몇 개씩 단어를 외운다던가, 수업을 듣는다든가 할 계획이에요.”
앤서니는 아카데미 동료들 중 특별히 친한 선수로 ‘로스파’와 ‘퀴드’를 꼽았다. “로스파는 영어를 잘해서 언어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아요. 퀴드는 같이 미드라인을 맡고 있다 보니 연습을 함께 하게 돼요. 계속 맞붙다보니까 배우는 점도 많고 서로의 플레이에 피드백도 자주 해주는 편이에요.”
머나먼 타국에서 연습생 생활을 할 정도로, 그가 처음부터 절실했던 선수는 아니었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아마추어리그를 뛰면서 실패를 거듭했고, 비로소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됐다.
“2017년 3월부터 12월까지 아마추어 선수를 했었어요. 지금 같은 프로구단 느낌이 아니라 잘하는 친구들끼리 모여 팀을 만든 거였죠. 정해진 스케줄이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느낌의 환경이 아니어서 다들 힘들었어요. 2018년에는 이탈리아와 영국, 독일에서도 잠시 했는데, 여기서도 연습 경기를 못 잡아서 솔로랭크만 4~5시간을 하면서 10시간 이하로 연습했어요.”
“처음에는 내가 성공 못한 이유를 구조적인 시스템 탓으로 돌렸어요. 나중에야 내가 연습을 게을리 하고, 편하게 늘 하던 것만 계속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죠. 바꿔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솔로랭크는 곧잘 했지만 팀 게임은 미달이었고 노력을 안 해서 정체가 됐어요.”
“챌린저스 시리즈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는데 훨씬 잘하는 선수들이 많았어요. 바이탈리티 등에서 연습생 제안도 받았지만 다른 선수들이 뽑혔어요. 그 선수들 중에는 지금 LEC(유럽 프로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도 있어요. 유럽에서 계속 성공을 못 거두니까 절실해지더라고요. 제가 젠지에 온 이유예요. 더욱 발전하고 싶고, 한국에서 내 모든 걸 걸고 성공하고 싶어요.”
앤서니는 과거 자신과 경쟁하고, 진검승부를 펼쳤던 선수 몇몇에게는 존경심을 표했다.
“프라피(LCL의 UOL 소속 원거리 딜러)와는 2017년 같은 팀에서 연습을 했어요. 당시에도 피지컬이나 메카닉적으로 뛰어났어요. 아마추어였지만 이미 프로에서 뛸 만한 수준의 선수였다고 생각해요. 지금 MSI에 진출했는데 언어적인 문제 때문에 후보예요. 잘 돼서 보기 좋아요.”
“블루(LEC SK 게이밍 소속 미드라이너) 선수는 독일인인데 프랑스어를 해요. 제가 지금보다 못했던 시절에 이 선수와 맞상대를 할 때면 호되게 혼났어요. 제가 작은 실수만 해도 압박이 들어오더라고요. 경기에서 많이 혼나면서 배웠어요. 지금은 좋은 친구인데, 자주 경기 내적인 얘기들을 공유해요. 두 친구 모두 성공한 것 같아서 보기 좋고 앞으로도 잘 되길 바라요.”
앤서니라는 선수의 뿌리는 젠지의 전신인 삼성 갤럭시의 미드라이너였던 ‘크라운’ 이민호다. 앤서니의 공식 닉네임인 ‘Gen G Resilience(레질리언스)’도 크라운으로부터 유래했다.
“제 롤모델은 크라운 선수에요. 크라운 선수가 이 일을 대하는 자세와, 2016년과 2017년 그와 관련된 얘기들에 빠졌어요. 저는 2016년에 삼성 갤럭시를 되게 좋아했었는데요, 당시 상성 갤럭시가 롤드컵 결승전까지 기적적으로 진출했는데 한 경기 차이로 우승을 못했어요.”
“당시 ‘페이커’와 맞서서 무너지긴 했지만 겨우 한 경기 차이였어요. 그런데 크라운 선수가 롤드컵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하루에 솔로랭크만 20판을 넘게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단순히 ‘보여주기식’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걸 멈추지 않고 꾸준히 계속 하는 거예요. 절실함이 느껴져서 감명을 많이 받았어요. 다음해인 2017년 봄엔 크라운 선수가 MVP 포인트도 가장 높았고 LCK에서 가장 잘했던 걸로 기억해요. 여름에는 다소 힘들긴 했지만 결국 롤드컵에 진출했고 ‘페이커’를 꺾고 우승까지 하게 됐어요. 화려하진 않지만 다시 도전하고, 끝없이 일어나는 크라운 선수의 모습을 존경하게 됐어요.”
“2017년 크라운 선수와 관련된 영상이 나왔는데, 제목이 ‘레질리언스(충격 등에서의 회복력)’였어요. 제 닉네임도 여기서 유래됐어요. 제가 생각하는 성공의 열쇠는 ‘레질리언스’에요. 꺾이지 않는 거요.”
앤서니의 꿈은 LCK 최초의 외국인 선수가 되는 것이다. 2부리그에서 뛴 외국인 선수는 있어도, 아직까지 1부리그에서 활약한 선수는 없다. 그의 나이는 사실 프로게이머로서 적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서 조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앤서니는 오히려 자신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LCK에서 ‘쇼메이커’와 ‘쵸비’, ‘페이커’와 맞붙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짓밟힐 것 같아요(웃음). 1년 정도 챌린저스에서 실력 향상이 필요해요. 젠지 ‘비디디’ 선수와의 경쟁도 자신 있어요. 지금은 힘들겠지만 1년 정도 훈련한다면 내후년에 젠지에 소속된 선수 누군가와도 충분히 경쟁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저는 게임 이해도가 매우 높아요. ‘네메시스’ 등 선수들이 방송하는 걸 보면서 많이 배웠고, LCK와 LEC 경기를 모두 챙겨 봐요. 다른 선수들보단 게임 이해도가 높다고 생각해요. 피지컬적으로 저보다 뛰어난 선수들을 만나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어요. 라인 관리, 아이템, 룬 선택 등에 자신 있어요. 22살, 아무 것도 이룬 게 없는 선수라 거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제 잠재력이 여전히 높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해서 이 잠재력과, 내가 가진 것들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요. 꼭 기회가 왔으면 좋겠어요. LCK에 데뷔한 최초의 외국인 선수로 역사를 쓰고 싶어요.”
인터뷰 말미에, 앤서니는 한국말로 문장 하나를 읊조렸다.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힘든 시간이 올 때마다 스스로 되새기는 말이에요. 내가 걷는 이 길이, 나를 지켜보는 모든 분들에게 자랑스럽게 기억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할 거예요. 부디 절 기억해주세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앤서니의 마지막 말이 계속 밟혔다. 문득, ‘레질리언스’라는 닉네임이 그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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