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끝자락에 선 남자는 다시 초등학생이 됐다. 매일 오전 9시에 등교해 어린이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다만 그의 눈은 칠판이나 선생님이 아닌 학생들을 향하곤 했다. 어린이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이 ‘깍두기 학생’의 원래 직업은 영화감독. 웹툰 원작 영화 ‘아이들을 즐겁다’의 시나리오를 쓰던 그는 작품 주인공인 어린이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일주일간 초등학교 수업을 청강했다. “어린이를 다 아는 척하지 않는 게 중요했어요. 어른의 입장에서 어린이를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으려고 했죠.” 최근 서울 연무장길에서 만난 이지원 감독이 들려준 얘기다.
이 감독은 3년 전 영화사로부터 ‘아이들은 즐겁다’ 영화화를 제안 받았다. 그는 ‘내가 해볼 수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에 쓰고 있던 시나리오를 멈추고 ‘아이들은 즐겁다’에 매달렸다.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 감정에 울림을 주는 원작 웹툰의 이야기 방식이 이 감독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는 원작의 분위기를 따르되, 어린이들이 어른 없이 여행하는 에피소드를 추가했다. 특히 “어린이의 천진난만함을 이용하는 느낌이 들면 안 된다”는 다짐을 작업 내내 붙들었다. 어린이를 대상화하지 않고, 삶의 주체로 바라보려는 노력이었다.
영화는 9세 소년 다이(이경훈)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전학을 간 다이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아픈 엄마(이상희)를 찾아가 수다를 떨고, 바쁜 아빠(윤경호)와 어색하게 저녁상을 나누는 일상이 따뜻한 색감으로 펼쳐진다. 이 감독은 “다이를 둘러싼 세계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서사의 큰 줄기로 삼았다. ‘엄마’라는 세계가 절대적이던 다이는 ‘친구와의 세계’ ‘아빠와의 세계’를 새로 만나고, 반대로 엄마와 이별을 겪기도 한다. “세계가 구축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거치며 다이는 한층 견고한 인물로 성장한다.
다이는 사회가 말하는 ‘정상’과는 거리가 멀다. 엄마는 병원에 살고, 다이와 피가 섞이지 않은 아빠는 일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운다. 다이는 자신의 가족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직감하고 이를 숨기려 한다. 남들과 다른 세계에 산다는 감각은 다이를 외롭게 한다. 이 감독은 다이가 애지중지하는 화분이 ‘정상’을 규정하는 틀이라고 봤다. 다이가 친구들과의 여행길 끝머리에서 화분 속 꽃을 들판에 옮겨 심는 장면은 “세상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틀 바깥에 있는 사람도 충분히 가치 있고 즐거울 수 있다”는 이 감독의 응원을 보여준다.
“어른이 만들어놓은 틀이나 울타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어린이가 어른에 의해 성장하는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의 경험과 관계를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를요. 물론 어린이의 안전을 위한 울타리는 필요하죠. 하지만 어른의 일방적인 판단으로 만든 울타리가 때로 어린이를 가두기도 해요. 예를 들어 영화에서 아빠는 다이를 위해 엄마의 병세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아요. 하지만 아빠의 그런 판단이 다이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잖아요. ‘나는 어른이고 너는 어린이니 내 판단에 따라야 해’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소통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이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도 어린이 배우들을 ‘완전한 존재’로 존중하려 애썼다. 윤가은 감독이 영화 ‘우리집’을 만들며 세웠던 촬영수칙을 ‘아이들은 즐겁다’ 촬영 현장에 적용했고, 어린이 배우들과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 ‘연기 커뮤니케이터’(배우 신지혜)를 기용했다. 다이가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장면을 찍을 땐, 다이 역 배우 이경훈과 특히 긴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배우에게 가족의 죽음을 상상하게 하는 게 폭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 어린이들이 생각하는 두려움과 슬픔이 뭔지를 묻고 답하며 감정을 끌어냈다.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은 문제의 책임을 악인에게 돌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린이가 주인공인 영화나 드라마엔 흔히 ‘나쁜 엄마’가 나와 소동을 일으키지만, 이 감독은 그런 인물마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봤다. 모범생 재경(박시완)의 엄마가 대표적이다. 그는 학원 하나 다니지 않는 다이가 받아쓰기에서 만점을 받자, 작게 분개하며 ‘커닝한 거 아니냐’고 혼잣말한다. 재경 엄마의 행동은 분명 나쁘지만, 이 감독은 이를 “개인의 특성에서 기인한 행동이라기 보단,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밀어붙이는 거”로 봤다. 이 감독의 이런 시선 덕분에 관객은 ‘일등만 바라는 극성 엄마’를 탓하는 대신, ‘일등만 최고로 여기는 사회’를 돌아보게 된다.
이 감독은 “‘아이들은 즐겁다’를 보는 성인 관객이 짧게나마 ‘나는 어떤 어른인가’를 돌아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의 이전 작품인 영화 ‘여름밤’ 역시 관객에게 ‘어른 됨’을 묻는다. 이 감독은 “내겐 그게 중요한 화두인 것 같다”며 “내가 좋은 어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좋은 어른’이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돌아봤다. 그에게 어른은 단순히 ‘나이 많은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자기 앞에 놓인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 이 감독은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살다보면 나를 온전히 믿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시기가 있잖아요. 진심을 알아주고 편이 돼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봐요. 그런 연대를 경험하는 순간 또한 삶에서 아주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하고요. 특히 요즘 세대는 이른 나이에 현실을 경험하고, 그러면서 비관도 자주 하잖아요. 그런 이들과 연대하는 게 어른의 역할 아닐까요.”
wild37@kukinews.com / 사진=CJ ENM, 영화사 울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