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문대찬 기자 =올해로 프로게이머 데뷔 6년 차를 맞은 ‘로치’ 김강희(23‧T1)는 선발보다는 후보가 익숙한 선수다. 2015년 콩두 몬스터(프레딧 브리온의 전신)에 입단해 2016년 ‘리그 오브 레전드(LoL) 챔피언스 코리아(이하 LCK)’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쟁쟁한 탑 라이너 가운데서 좀처럼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되는 약한 라인전 능력이 프로 생활 내내 발목을 잡았다.
그런 그가 수많은 은퇴 기로 속에서도 선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건 지독한 연습량 덕분이다. 김강희의 시즌 당 솔로 랭크 횟수는 2000~3000판에 이른다. 휴가를 반납하고 연습에 매진하는 경우도 잦아 코칭스태프가 간곡히 만류에 나설 정도다. 그가 리그 최고의 명문 구단인 젠지‧T1의 부름을 받은 것도 지도자들이 그의 프로의식과 간절함, 성실함을 눈 여겨 봤기 때문이다.
물론 김강희에게도 꿈을 놓아주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 지난해 T1의 선발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고 표류한 그는 올해 초 은퇴를 고민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도전을 결심하고 T1 2군과 계약을 맺었다. 프로게이머로는 적지 않은 나이의 그가, 유망주가 대거 포진한 2군에서 뛰기로 한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12일 강남에 위치한 T1 사옥에서 만난 김강희는 “2군에서 뛰는 게 1순위는 아니었다. 1군이 우선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지만 T1 쪽에서 팀을 찾을 수 있도록 배려를 잘 해주셨다. 해외도 고려해 봤고 실제로 연락도 왔지만 깊게는 접촉이 안됐다”며 “개인적으로 성장도 할 겸, 2군에서 한 번 더 해보면서 기회를 노려보려고 했다”고 전했다.
“올해 많은 선수들이 은퇴를 했다. 나도 사실 그만할까 생각했다. 가장 좋아했던 일이기 때문에 결정하기 많이 힘들긴 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 말고는 잘하는 게 없다.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며 계약을 했다. 작년이 내가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시기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좋은 팀에서 좋은 선수들과 합을 맞출 수 있었는데 거기에 어울리지 못해서 내 자신에게 많이 실망했다.”
“작년에 정말 시작이 좋았다. 담원이라는 팀을 이겨서 들떴던 것 같다. 당시엔 ‘다음 경기도 캐리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었다. 다음 상대가 ‘큐베’ 선수였는데, 정말 친한 선수니까 혼내주고 싶더라.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센 챔피언을 했는데 그렸던 그림대로 잘 안 되고 져버렸다. 단 한 경기만으로 기회가 끝난 건 아니었다. 경쟁하던 칸나 선수가 잘 했고, 그걸 따라갈 만큼 내 실력이 당시엔 좋지 않았다. 내가 못하고, 칸나 선수가 되게 잘해주고… 그 차이였다. 아쉽다.”
“어렸을 때 막연히 공부하기 싫어서, 게임이 재미있어서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의 나이에 학교도 안 다니면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 올라와 나이 많은 형들과 숙소 생활을 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시작해서 그런지, 철이 빨리 든 건지는 모르겠다만 책임감이 생기더라. 이대로 선수 생활을 그만 둬 버리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자랑스럽게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내 인생의 청춘, 10대와 20대의 모든 생활을 쏟아 부었다. 별다른 취미도 없이 LoL에 모든 걸 쏟아 부은 거다.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지금 그만두기엔 이르다. 올해 포기하지 않은 건 나름 잘한 선택 같다. 이 LoL이라는 게임이 참 얄궂다. 어떨 땐 참 좋다가도… 내게는 애증이다.”
지독한 연습벌레지만, 김강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격언은 믿지 않는다.
“노력만 해서는 이길 수 없더라. 빠른 반응 속도가 필요한 분야는 재능이 우선이다. 재능이 있는 선수도 노력을 충분히 많이 한다. 거기다가 내가 하는 노력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무턱대고 게임만 해왔다. 좋게 말하면 열심히 하는 거지, 관계자 분들이 날 보면서 ‘미련하다’ 싶었을 거다. 이 업계에서 ‘열심히’는 좋은 게 아니다. 잘해야 한다. 솔로 랭크보다는 스스로의 플레이나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를 연구하는 게 상대적으로 효율적이다. 그걸 뒤늦게 깨달아서 살짝 아쉽다. 그래도 그만큼 많이 해봤기 때문에 깨달은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보면 옛날보다는 조금 풀어졌다. 어떻게 보면 초심을 잃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쉬는 시간엔 LoL을 안 하고 쉰다. 드라마를 보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한다. 조금 유연해졌다. LoL 말고 별다른 취미가 없는 건 좀 막막하다. 애정을 게임 말고는 쏟는 게 없어서 하나쯤은 생겼으면 좋겠다. 그나마 요새는 운전학원을 다니고 있다. 페이커 선수의 차를 타 봤는데, 옆에서 보니 운전하는 모습이 멋있더라. 드라이브가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 것 같다.”
김강희는 선수 생활이 길어지면서 게임을 대하는 자세, 스스로를 돌보는 자세도 바뀌었다고 전했다.
“어릴 때는 주변에 다 형들이었다. 무얼 하자고 하면 따르는 경향이 많았는데 이제 동생들이 아주 많다. 나이가 들다 보니까 조금 책임감 있게 해야 될 것 같고, 보고 배우는 동생들도 많을 테니까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생활적인 부분도 그렇지만 게임을 잘해서 카리스마 있게 데려가는 모습이 필요한 것 같다. 페이커 선수를 보면 멋있는 것 같다. 같이 하면 믿을 만한 포스가 느껴지니까. 나도 그런 선수가 되고 싶다.”
사사로운 감정을 접어두는 법도 배웠다. 김강희는 올해 T1 2군으로 이적한 ‘미르’ 정조빈과 과거 솔로랭크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감정의 골이 깊은 사이다. 같은 팀에서 뛰게 된 것에 대한 우려의 시선이 적지 않았지만, 정조빈을 용서하고 포용해 팀 융화에 앞장섰다.
“사실 2군 계약을 하기 전에 팀원들의 이름을 들었다. 거기에 미르 선수도 포함이 돼 있었다. 고민이 많이 됐다. 그게 아니더라도 힘든 상황이었는데 신경 쓸 일이 하나 더 생기는 거니까 힘들 것 같더라. 계약을 안 할 생각도 있었다. 주변에서 ‘자존심이 뭐가 중요하냐’라고 얘기해주시는 분들도 있고, ‘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 친구가 어릴 때 한 실수니까, 잘 포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잘한 선택인지는 모르겠는데, 같이 좋게좋게 풀어 성적을 잘 내 다행이다.”
올해 초 출전한 ‘케스파컵’에서 다소 부진했지만, 기량을 끌어올린 김강희는 2군 리그에서 최고의 탑 라이너로 활약했다. 팀을 정규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린 뒤엔 MVP까지 수상했다. 그가 여전히 유망한 선수라는 것을 보여줬다.
“2군에서 1년 뛰기로 한 이상 우승은 무조건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내 경기력 자체는 엄청 압도적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서머 시즌엔 더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첫 단추는 잘 꿴 것 같다. 스프링 시즌엔 아쉬울 것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다만 서머 시즌에는 내 의견을 팀원들에게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김강희는 MVP 상금 200만원에 사비 300만원을 더해 총 500만원을 기부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기부는 결승전에 올라가기 전부터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기부할 여유가 없었는데 어떻게 선수 생활을 하다보니까 여유는 생기더라. 개인적으론 기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꾸준히 갖고 있었다. ‘우승을 하면 상금을 기부해야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내가 이런 희망을 가지면 꼭 거꾸로 돼서 우승을 못 하더라. 이번엔 다행히 잘 됐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곳에 쓰이면 좋겠다.”
김강희는 프로게이머 생활이 막막하고 두려우면서도, 참 매력적인 일 같다며 웃었다.
“매년 10월과 11월, 재계약 기간만 되면 항상 ‘내년에 뭐하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난 항상 1년씩 계약을 해 왔으니까. 이번에도 내년에는 정말 게임을 더 하고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두려웠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어디 있을지도 상상이 안 되니까.”
“한편으로는 재밌는 것 같기도 하다. 내 가치를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거, 그게 매력인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롤드컵에서 우승하고, LoL이라는 게임이 끝날 때 즈음엔 잘했던 선수로 기억에 남고 싶다. 하지만 당장으로서는 많이 부족하니 더 발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무엇이 됐든 이 판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 코치든 관계자든, 어떤 식으로든 내 모든 걸 쏟아 부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자리를 빌려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항상 느끼는 건데, 나는 남을 응원하는 성격은 잘 못 된다. 나를 계속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너무 신기하고 감사하다. 보답을 잘 못 해드린 것 같아 죄송하다. 좋은 기회는 많았는데…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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