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문대찬 기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e스포츠는 한낱 ‘게임 놀이’로 치부됐다. 보편적인 스포츠 종목인 축구나 농구처럼 몸을 움직여 체력을 소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터운 팬 층이 생기고, 미래 성장 가능성이 조명 받으면서 최근 위상이 급격히 올라왔다. 몇몇 국가에선 e스포츠 협회가 정식 스포츠 단체로서 인정받고 있고, 2021 아시안게임에서는 e스포츠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국제대회가 개발사의 소유물… 공정성 훼손 우려
다만 e스포츠가 ‘e’를 떼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적잖다.
주인이 없는 일반 스포츠와 달리 게임은 사기업의 소유물이다. 개발사의 입맛대로 대회를 주무를 수 있다는 의미다. 스포츠의 기본 덕목인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나온다.
23일 막을 내린 ‘리그 오브 레전드(LoL)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MSI)’은 공정성 논란에 휘말렸다. MSI는 각 지역 스프링 시즌 우승팀이 모여 최강자를 가리는 국제 대회다.
이 대회에서 한국 대표인 담원 기아는 1위로 4강에 진출했다. 역대 MSI에선 1위로 4강에 진출한 팀은 금요일 경기에 배정됐다. 일요일 결승전을 앞두고 충분한 휴식 시간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2위로 4강에 진출한 중국의 RNG가 귀국 48시간 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코로나19) 혈청 검사를 받아야 한다면서 일정 조정을 요청했고, 라이엇 게임즈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논란이 됐다. 그 결과 RNG가 21일 금요일에, 담원 기아는 22일 토요일에 경기를 치렀다. 라이엇은 담원 기아와 아무런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일정 변경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담원 기아가 충분한 휴식 없이 결승전에 임한 반면, RNG는 4강전을 토대로 담원 기아를 연구할 시간마저 넉넉히 주어졌다. 실제로 담원 기아는 결승전에서 집중력이 떨어진 기색이 역력했고, RNG에게 2대 3으로 패하며 우승컵을 놓쳤다.
미국 개발사 라이엇 게임즈는 2016년 중국 텐센트에 완전 인수됐다. ‘LoL 월드챔피언십(롤드컵)’을 2회 연속 중국에서 개최하는 등 그간 꾸준히 의구심을 받아왔지만, 이번 사태로 라이엇 게임즈가 중국을 편애한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업데이트 따라 전력 들쑥날쑥… 개발사 악용 우려도
개발사가 대회를 사유함으로써 비롯되는 부작용은 또 있다.
기존 스포츠도 시대 상황에 맞게 룰을 조금씩 수정하지만, e스포츠는 변화의 폭이 훨씬 크다. 패치 및 업데이트를 통해 좋은 챔피언, 아이템 등이 바뀌고 이에 따라 전략도 변한다. LoL e스포츠만 해도 디펜딩 챔피언이 롤드컵 진출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레전드로 평가 받는 선수도 급격한 메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은퇴를 결정하곤 한다.
매년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고, 매 시즌마다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오지만 만약 악용될 경우 문제가 생긴다. 개발사의 입맛대로 특정 팀, 특정 지역에 유리한 패치를 적용시켜 우승 지역이 정해진, 각본 있는 대회로 전락할 가능성이 생긴다.
중국에서 LoL e스포츠 코치 생활을 한 A는 “2017년부터 라이엇이 패치 방향을 운영에 강점이 있는 한국보다는 중국이 잘하는 교전 쪽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걸 체감했다”며 “중국이 실력이 올라온 것도 사실이지만 라이엇이 환경 조성을 해준 것도 맞다”고 전했다.
일어났더니 대회 증발… 거리로 내몰린 프로게이머
개발사의 뜻에 따라 대회 존폐가 결정되는 것도 e스포츠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지적된다.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지난 2018년 실적 부진과 수익 악화를 이유로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글로벌 챔피언십’을 폐지한 일은 e스포츠의 발전 잠재력을 한참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대부분의 게임단은 리그가 계속 진행될 것으로 여겨 로스터 목록 제출까지 완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블리자드 측은 유예 기간도 없이 일방적으로 대회 폐지를 결정했다. 이로 인해 관련 종사자와 프로게이머들은 하룻밤 만에 실직 신세가 됐다.
전 세계적인 리그가 순식간에 증발하면서 e스포츠 대회가 개발사의 사정에 따라 언제고 막을 내릴 수 있다는 우려가 e스포츠 업계에 퍼져나갔다. 이는 투자자들의 투자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 e스포츠 관계자는 “스타크래프트의 경우 개발사가 대회엔 관여하지 않아서 협회가 이를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라이엇 등 개발사들이 자기 관리를 주장하고 나서면서 영향력이 막대해졌다”며 “개발사들이 손을 떼고 중립적인 협회를 만드는 방법이 좋아 보이지만 현실적으론 무리다. 온전히 개발사들의 책임과 양심에 기댈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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