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fleuriste 앞에서 보자” 친구와 전화 통화를 마친 뒤, 한참을 고민했다. 플로스트인지, 플로피디스크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불어를 진작 배워둘 걸 그랬나. 다시 물어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약속 시간보다 1시간 일찍 나와 장소를 찾았다. 목이 말라 편의점에 들어갔다. ‘eau distillée’, ‘breuvage’, ‘bière’. 생소한 표기로 가득하다.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무엇이 생수인지 알기 어려웠다.
알지 못하는 외국어가 일상이 된 사회. 위의 사례는 가정이다. 누군가에게는 현실이다. 노년층, 북한이탈주민 등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이런 생경함이 일상이다. 간판과 공문서, 사용설명서 등 생활 속 과다한 영어 표기·표현으로 인해 시민이 불편을 겪고 있다.
11일 한글문화연대에 따르면 지난 9월 한 달 동안 중앙정부기관에서 나온 자료 1727건 중 902건에서 외국어 표현·표기 남용이 확인됐다. 전체 자료의 52.2%다. 낱말 1000개마다 외국 문자를 5.7개, 외국 낱말을 6.4개 사용했다. 광역자치단체의 보도자료 중 외국어 표현·표기 남용은 57.4%(1476건)였다.
주로 사용된 외국어 표현은 인프라(기반시설), 바우처(이용권), 글로벌(세계적), 소셜벤처(사회적 벤처), 가이드라인(지침), 라이브커머스(실시간 방송 판매), 포럼(토론회), 거버넌스(민관협력), 라운드테이블(원탁회의), 아카이브(자료보관소) 등이다.
공공기관의 외국어 표현·표기는 실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경기 광주역 인근 도로 위에 ‘K&R’이라는 표기가 대표적이다. ‘Kiss & Ride’의 약자다. 승용차를 타고 역사에 도착한 이용자가 환승을 위해 내리는 공간이다. 한글 단체 등에서 국토교통부에 항의, K&R 표기를 환승정차구역으로 변경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각종 상품과 상점, 주거 공간 등에서도 영어 표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핸드워시(handwash·비누)’, ‘에어(air·공기)’,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apartment community center·아파트 거주민 공간)’, ‘레스트룸(rest room·화장실) 등이다. 안내문에 음식 이름을 영어로만 표기해놓는 곳도 있다. 앞서 ’전자렌지에 3min’이라고 표기된 컵라면이 출시되기도 했다. 3min은 3minutes(3분)의 약자다. 3분간 전자렌지에 넣고 돌리라는 뜻이다. 해당 상품은 현재 판매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간판도 마찬가지다. 외국어로만 표기된 간판은 옥외광고법상 위법이다. 5㎡ 이상의 간판을 외국 문자로 표시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함께 적어야 한다. 다만 특별한 사유를 넓게 해석, 실질적인 처벌은 이뤄지지 않는다. 과태료 등의 강제조항도 없다. 거리 곳곳에서 영어로만 표기된 간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수의 프랜차이즈 업체에서도 한글 대신 영어로만 표기된 간판을 사용 중이다. 약국 대신 ‘pharmacy’, 카페 대신 ‘cafe’ 또는 ‘coffee’ 등만 표기하는 곳도 있다. 지난 2019년 기준, 서울시 내 간판 7252개 중 외국 문자 간판은 1704개(23.5%)로 조사됐다.
노년층은 영어 표현·표기에 불편을 호소했다. 서울 동대문구에 거주하는 60대 중반 여성은 “영어 이름으로 된 가게에서 보자고 하면 어딘지 찾지 못해 곤란할 때도 있다. 간판 그림을 보고 찾아간다”며 “한글로 써주면 좋겠다. 모른다는 것이 창피해서 누구에게 묻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앞에서 교통봉사를 하던 백연희(74·여)씨도 “TV를 봐도 영어가 섞여 있으면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많다. 뜻을 모르니 ‘영상만 보고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며 “(영어를 모르는 노인들을 위해) 한글 자막을 넣어 조금만 뜻을 설명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고현종 노년유니온 사무처장은 “플렉스(flex·과시)와 같은 새로운 영어 단어를 들으면 뜻을 알지 못해 위축될 때가 있다”며 “뜻을 듣더라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젊은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가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노년층에게 필요한 기초연금이나 퇴직연금 등에 대해 강의를 들을 때도 DC(확정기여), DB(확정급여), IRP(개인형 퇴직연금) 등의 영어 단어가 나오면 당황스럽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어떨까. 김양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친숙하지 않은 외국어를 사전정보 없이 노출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면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안내판, 정보 등에는 한국어 중심으로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다만 “‘(간판에 외국어 병기 등은) 국제화의 과정 중 하나”라며 “외국인 관광객 등이 한국을 찾았을 때 좀 더 편하게 활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공공기관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공공언어’다. 좀 더 많은 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써야 한다”며 “외국어·외래어를 남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밝혔다. 이어 “일각에서는 홍보·디자인을 위해 상품명이나 간판에 영어로 표기하기도 한다. 개인의 판단이기에 국가기관에서 함부로 제재가 어렵다”면서 “한글로 상품명·간판을 표기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국민 인식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이소연 기자 soyeon@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