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벽의 라스칼. 단단하고 안정적인 플레이를 잘 하는 김광희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지난 2년간 ‘LoL 챔피언스 코리아(이하 LCK)’에서 젠지e스포츠 ‘반지원정대’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애칭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줬다.
다만 속내는 밝지 않았다. 팀을 향한 외부의 높은 기대치로 인한 압박감이 매 시즌 몸을 짓눌렀다. 지난 10월 ‘LoL 월드챔피언십(롤드컵)’을 치르는 과정에선 끝내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젠지와 결별한 김광희는 지난달 23일 KT 롤스터에서 새 시작을 알렸다. 그의 첫 시작을 함께 한 강동훈 감독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 때문일까, 지난 22일 연습실에서 만난 김광희의 얼굴은 한층 밝았다. 인터뷰에는 여유가 있었다. “마음이 보다 단단해졌다”는 김광희의 얘기를 들어봤다.
롤드컵 이후 처음이에요. 휴식은 좀 취하셨나요?
어딜 돌아다니는 걸 안 좋아해서 게임을 많이 했어요. 가족, 친구들이랑 시간을 많이 보내진 못했고 얼굴 정도 봤던 것 같아요. 얼마 전엔 ‘데프트’ (김)혁규 형이랑 부산에 가서 ‘케리아’ (류)민석이를 보고 왔어요. 저희 셋 모두 계획을 먼저 세우는 사람도 없고, 그런 걸 또 귀찮아하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새벽 6시였나, 혁규 형이 부산을 가자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저도 마침 깨어 있었어요. ‘정말이냐, 뻥이냐’ 물었는데 진짜라고 해서 한달음에 부산으로 갔죠. KTX를 타고 갔는데, 제가 이동하는 중엔 잘 못자서 그날 하루 종일 좀 피곤했어요(웃음).
롤드컵 얘기를 해 볼게요. 4강에서 젠지와 명승부를 벌인 EDG가 우승했어요.
아쉬운 심정이었죠. 아깝기도 하고요. 젠지에 있을 때 아쉬웠던 게, 우리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이길 수 있는 경기들이 많았거든요. 상대가 압도적으로 잘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조금만 더 잘했다면 충분히 이길 만 했던 것 같아요.
롤드컵 당시 젠지 선수단이 전반적으로 삐걱거리는 모습이었어요. 라스칼 선수도 선발에서 잠깐 빠지기도 했는데 팀적으로,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이 있나요?
일단 개인적으로는 어떤 환경에서든 잘해내야 하는 게 프로라고 생각을 하는데, 당시엔 저도 조금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런 부분들을 극복하지 못한 게 아쉬운 것 같아요. 올라가면서 내가 팀적으로 할 수 있는 부분들을 다 해주지 못했거든요.
제 기억에 롤드컵에 처음 갔을 때 젠지의 스크림 성적이 되게 안 좋았어요. 그게 저한테는 문제는 안 됐어요. 젠지에 있으면서 스크림 승률이 80% 넘게 나와도 질 때도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롤드컵에서 한 번 패하고 나서 교체가 되니까 저도 조금은 위축되더라고요.
라스칼 선수가 EDG전이 끝난 뒤 팀원들에게 이별을 암시하는 듯한 인터뷰를 했었죠. 라스칼 선수나, 팀원들이나 이별을 어느 정도 직감했던 건가요?
사실 팀원들뿐만 아니라 감독, 코치님까지 포함해서 누군가는 바뀔 걸 알고 있었어요. 팀 입장에서 ‘원코(원코인⋅추가 기회)’를 안 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죠(웃음).
원코를 혹 주더라도 누군가는 많이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 역시 힘들었고요. 멤버 그대로 완벽하게 가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많이 바뀔 줄은 몰랐네요.
‘반지 원정대’로 활동하면서 고마웠던 점,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요?
아쉬웠던 점은 우리가 기대를 처음부터 많이 받아서, 심리적으로 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게 많았거든요. 나중에는 괜찮아졌지만 처음엔 서로 양보 같은 걸 잘 못했던 것 같아요. 고마웠던 점은 친구들이 다 너무 착했어요. 프로로서 돋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건데, 그 과정 속에서 서로 양보도 많이 해주고 배려를 많이 해줬어요. 마지막엔 정말 친해진 것 같아요. 헤어졌지만 비즈니스 관계가 아닌 좋은 친구들을 얻은 것 같아서 만족스러워요.
KT로 이적했어요. 계기가 궁금해요.
이적 시장이 열리자마자 강동훈 감독님이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셨어요. 그 다음에 사무국을 만났는데 적극적으로 움직여주셔서 좋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KT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었죠.
아무래도 과거에 스승과 제자로 있었던 강 감독님의 영향이 컸다고 들었어요.
저는 감독님과의 사적인 감정을 제외하고도 감독님의 능력 중에서 팀을 하나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높게 평가해요. 프로 생활을 하면서 이 LoL이라는 게임이 팀끼리 똑같은 생각을 하고, 하나가 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되게 많이 해요. 그런데 감독님께선 팀을 하나로 만든다고 느끼거든요.
사적으로는 제가 첫 프로게이머 생활을 감독님과 함께 한 인연도 있고, 다투기도 많이 다퉜지만 친해지고 가까워져서 제 생각을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있는 분이에요. 게임을 제외하고 제 가족관계나 개인적인 인간관계, 스트레스 등을 편하게 얘기할 수 있어서 든든한 형 같은 느낌이 들어요.
KT에서의 생활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일단은 되게 마음이 편해요. 젠지에 있을 땐 우리가 우승을 못하거나, 게임을 1~2판만 져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팀이 무얼 원하는 지도 알고 있고, 기대치가 높았으니까요.
그런데 KT에선 감독님이 처음 하신 말씀이 ‘길게 보고 싶다’는 거였어요. 한 두 차례 지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하나하나 만들어가자고 해주신 게 심리적으로 위안이 됐어요.
연습을 해보니 지금 당장은 맞춰갈 게 많지만, 과정이 꽤나 괜찮은 편이어서 만족스러워요. 그런데 생각보다 경기력이 좋으니까 욕심이 또 생기더라고요(웃음). 어젠 살짝 욕심이 나서 감독님한테 이것저것 말씀드렸더니 욕을 먹었어요. 천천히 생각하라고요. 다들 잘해서 저만 잘하면 될 것 같아요.
젠지에서 함께 있었던 ‘라이프’ 김정민 선수와 KT에 오게 됐어요. 3년째 같이 뛰게 됐어요.
정말 편해요. (문)우찬이도 그렇고 정민이도 그렇고 함께 오래 알았던 사이라 저한테 편하게 장난을 치는데 그게 저는 되게 좋아요. 친한 상태에서 게임적으로 편하게 얘기할 수 있으면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너무 얘기를 못하는 것보다 이런 분위기가 훨씬 좋은 것 같아요.
‘커즈’ 문우찬 선수와 재회했는데, 익숙한 정글러라 아무래도 편할 것 같아요.
확실히 옛날에 함께 뛰었기 때문에 서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런데 저희가 합을 맞춘 것도 2년 전이고, 그 후 각자 다른 팀에서 뛰었기 때문에 맞춰가야 할 부분이 지금은 오히려 더 많은 느낌이에요. 그 사이에 메타도 계속 변했고 원하는 방향성 같은 것도 달라졌거든요. 그래도 금방 맞춰갈 거 같아서 큰 걱정은 안 돼요.
나머지 멤버들과는 친해졌는지 궁금해요.
다른 멤버들도 생각보다 다 편안해요. 낯을 가리는 애들도 없고요. ‘기드온’ 선수 같은 경우는 먼저 다가와 줬어요. ‘아리아’ 선수는 좀 재밌어요(웃음). ‘에이밍’ 선수도 그렇고 다 유쾌해요. 친해지는 건 금방 친해진 것 같아요. 특히 정글러 선수들이 분위기 메이킹을 재밌게 잘하고 있어요.
프리시즌 탑 메타는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빅토르’, ‘아크샨’, ‘요네’가 요즘 솔로랭크에서 자주 나와요. 그런데 요네 같은 경우는 ‘치명적인 속도’ 룬이 너프가 되기도 했고 팀 게임에서는 잘 안 나오더라고요. 나머지 아크샨과 빅토르는 좋은 챔피언인 것 같아요. 사실 시즌 초나 롤드컵 초반에는 여러 가지 챔피언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막상 대회에서 게임을 많이 해보면 느낄 수 있어요. ‘이 챔피언은 압박을 많이 받는다’ 이런 식으로요. 대회를 뛰어봐야지 구도가 확실히 정리 될 것 같아요.
차기 시즌 리그 구도를 예상해 보자면요?
아무래도 멤버가 그대로 유지된 팀들이 좋은 성적을 거둘 것 같아서 시즌 초에는 T1이 제일 잘할 것 같아요. 담원이나 젠지도 멤버가 좋다 보니까 잘할 것 같고요. 다들 전력이 만만치 않아서 대부분의 팀들이 경계가 돼요.
가까운 형이자 베테랑 중 베테랑인 ‘칸’ 선수가 은퇴했잖아요. 어떻게 바라봤는지 궁금하네요.
(김)동하 형 은퇴식을 갔어요. 거기서 나오는 영상을 볼 땐 찡하더라고요. 동하 형이 은퇴한다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무렇진 않았는데 막상 영상을 보니까 ‘고생을 참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하 형도 그렇고 ‘데프트’ 선수도 그렇고 다 열정적이거든요. 저보다도 몇 년을 더 한 선수들인데 아직도 열정적이에요.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 은퇴하는 느낌이라 아쉽죠. 군대문제만 해결되면 더 잘할 형들인데. 그 부분이 정말 아쉬워요.
저요? 전 LoL을 하면 할수록 열정이 더 생겨요. 성적 욕심도 나고 더 잘하고 싶고, 잘해서 팬들한테 응원 받는 게 너무 좋아요. 마인드와 열정은 저도 형들 못지않아요. 앞으로도 더 하고 싶어요.
2021년을 돌아보면 어땠나요?
올해 막바지, 새로운 도전을 다른 팀에서 시작하게 돼서 그게 좋은 것 같아요. 돌아봤을 때는 아쉬운 점 말고는 없는데요, 게임 외적으로는 얻은 게 많은 것 같아요. 젠지에 있으면서 되게 많은 경험을 해서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아요. 좋은 경험이었어요. (정말 ‘철벽의 라스칼’이 됐네요?) 하하, 그런 건가요. 멘탈이 단단해졌죠.
새해에 바라는 ‘라스칼’의 모습이 궁금해요.
저한테 솔직해질 때 솔직해지고, 누군가가 저한테 의지를 했으면 좋겠어요. 저 또한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잘 되면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KT 팬 분들에게 인사, 각오 부탁드려요.
리그 마지막에 좋은 성적을 내는 팀이 승자인 느낌이잖아요. 시즌 초반에 잘 안 될 수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단단한 팀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할 거예요. 팬 분들께서도 좀 많이 믿어주시고 응원 많이 해주시면 우리도 힘을 내서 지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에는 웃는 모습 보여드리는 그런 팀이 되도록 많이 노력하겠습니다!
문대찬 기자 mdc0504@kukinews.com, 사진=임형택 기자 taek2@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