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7]
글로벌 성 평등 지수 0.687. 156개국 중 102위. 한국은 완전한 평등에서 이만큼 멀어져 있다. 기울고 막힌 이곳에서도 여성은 쓴다. 자신만의 서사를.
명절이 즐겁다. 명절 부엌에 들어가 본 일이 없다. 어린 조카와 친지를 만나면 조언을 자주 한다. 남성과 여성이 각각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명절 모임에 어느 순간부터 여자 조카들이 오지 않는다. 오더라도 싸늘한 눈길로 고개만 숙인다.
읽으면서 내 이야기 같았다면 고민해봐야 합니다. 당신이 ‘명절빌런’인지 아닌지를. 어릴 때는 착했던 조카들이 나이 먹고 변한 게 아니냐고요? 당신을 위해 하나하나 되짚어봤습니다. 당신의 조카가 이른 명절파업을 선언하게 된 과정을요.상황 1
명절 첫날, 고향에 도착했습니다. 가족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오랜만에 보는 조카도 있네요. 그런데 살이 좀 찐 것 같습니다. 한창 예쁠 스무 살인데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한마디 건넸습니다. “아니 못 본 사이에 좀 살이 찐 거 같네? 지금 제일 예쁠 때인데 관리 잘해야지” “남자친구가 뭐라고 안 했어? 조심해. 그러다 갑자기 뻥 차이는 수가 있어” “취업 준비할 때 몸매 관리도 필수야. 여자는 면접에서 그거 되게 중요하다?” 멋쩍게 웃으며 듣던 조카의 얼굴이 점점 굳어집니다. 한마디 덧붙입니다.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상황 2
한숨 자고 일어나니 온 집안에 전 부치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조카와 형수가 한자리에 앉아 음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명절 풍경은 모름지기 이래야 하죠. “시집가면 평생 할 거 지금부터 하지 마”라며 누군가 조카에게 휴식을 권합니다. 조카는 “제가 안 하면 엄마가 혼자 다 해야 하잖아요”라며 입을 삐죽 내민 채 녹두전을 뒤집습니다. 볼멘 얼굴인 조카를 본 당신. 따끈한 전을 집어먹으면서 “아유 시어머니 앞에서도 그 얼굴로 해라. 아주 사랑받겠다”고 장난을 칩니다.
상황 3
둘러앉아 식사를 합니다. 돼지갈비, 잡채, 사라다, 더덕 무침, 간장게장.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걸 보니 명절이 더욱 실감 납니다. 어머니 옆에 앉아 “골고루 드시라”며 이것저것 반찬을 권합니다. 평소 못다 한 효도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어느새 음식이 동났습니다. 반대편 ‘여자상’에서 밥을 먹던 조카에게 말합니다. “○○아, 할머니 잘 드시니까 잡채랑 게장 좀 더 갖고 와” 아 한 가지 깜빡했습니다. “미지근한 물도 떠 오고” 식사를 마쳤지만 입이 심심합니다. 베란다에 명절 선물로 들어온 배가 있던 게 생각납니다. “저희 배 좀 먹을까요?” 상을 치우던 조카가 “지금요?”라고 반문합니다. “형수님은 설거지해야 하시니까 네가 좀 깎아와야겠다”
상황 4
아까부터 살갑게 말도 붙이지 않고 차갑게 쏘아만 보는 조카가 마음에 걸립니다. 설거지 후 방에 들어가려는 조카를 불러 세웠습니다. “○○아, 이리 와서 앉아봐 오랜만에 다같 이 모인 건데”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조카에게 말합니다. “여자는 어디서든 생글생글 웃어야 돼. 그렇게 표정 짓고 있으면 남자가 도망간다” 조카가 정색하며 “그게 무슨 말씀이냐. 아까부터 말씀하시는 내용 불편하다. 차별이다”라고 대꾸합니다. “아니 너 여대 다니더니 변했다. 너도 페미인지 뭔지 하니? 어어, 너 상은 왜 붙잡아 갑자기?”
이소연 기자 soyeon@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