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이대로 둔다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까지도 넘볼 게 분명합니다. 한국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러시아 제재에 나서기를 바랍니다”
28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시민사회와 우크라이나 교민, 재한 우크라이나인은 전쟁의 책임은 온전히 러시아에 있음을 분명히하고 무력 사용 중단을 강력 요구했다.
수십여명에 이르는 참가자들은 ‘War has No Winner’(전쟁에는 승자가 없다), ‘No War No Putin(전쟁 반대 푸틴 반대), ‘Putin Go to Hell’(푸틴은 지옥에나 가라), ‘Withdraw Russian Troops Now!’(당장 러시아군을 철수하라) 고 적힌 팻말을 손에 들었다. 미처 팻말을 준비하지 못한 이들은 휴대폰 화면에 ‘No War’글자를 띄웠다.
391개 시민단체들은공동 기자회견문을 통해 시민사회는 전쟁은 반인륜적 범죄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엔 헌장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못박았다. 단체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수년간 우크라이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국제사회 노력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우려를 명분으로 들지만 우려를 근거로 공격하는 것은 명백한 선제공격에 해당한다”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 교민 발언도 이어졌다. 30년을 우크라이나에서 지내다 얼마 전 귀국한 선교사 김평원(61)씨는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아버지를 죽음이 기다리는 전쟁터로 보내 딸과 아버지가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이냐. 무엇 때문에 13명의 젊은이들이 폭탄과 함께 죽음의 길을 택하게 하는 것이냐”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우크라이나가 결사 항전하다가 무너진다면 전세계가 강한자에 의해 경계선이 그어지는 약육강식의 판도라 상자가 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난민을 보호할 구체적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일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는 “지난 26일까지 12만명 이상 우크라이나 시민이 난민이 되어 국경을 넘었고 85만명이 국내실향민이 되었다”면서 “러시아를 규탄하고 국제적 제재에 동참할 것을 뒤늦게야 밝힌 한국 정부의 난민 보호에 관한 역할은 무엇인가. 한국 정부는 외교적 수사나 입장을 넘어 평화를 지지하고 난민보호를 천명하는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했다.
이 변호사는 △ 향후 우크라이나 국적 외국인들에 대해 특별임시체류조치와 같은 조치 즉시 시행 △국내에 있는 우크라이나 이주민들이 난민으로서 보호를 요청할 경우 전향적 심사를 통해 신속히 난민 지위 부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 변호사는 “난민에게 국경을 열고 환대하는 것이 평화고 가장 강력한 연대이며 반전 운동”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공습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참석자들이 바닥에 눕는 ‘다이인’(die-in) 전쟁 반대 퍼포먼스도 진행됐다. 이들은 한국어, 영어, 러시아어 성명을 주한 러시아 대사관에 전달했다.
기자회견 뒤에도 재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영웅에게 영광을’이라는 뜻이 담긴 노래 ‘우크라이나를 위한 기도’와 우크라이나 국가를 함께 불렀다.우크라이나 국적의 타티아나(29·여)씨는 ‘STOP PUTIN STOP THE WAR’(푸틴을 막아라 전쟁을 멈춰라) 문구 밑에 푸틴 대통령과 독일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사진을 나란히 붙었다. 타티아나씨는 “평화를 위해서라며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 그리고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면서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푸틴 대통령이 서로 닮았다”고 설명했다.
타티아나씨 고향은 수도 키예프 근교다. ‘고국을 떠날 수 없다’며 부모님은 우크라이나에 남는 것을 택했다. 벙커에 몸을 숨긴 부모님과 매시간 연락을 주고받는다. 타티아나씨는 “매일 뉴스와 SNS만 보느라고 잠을 자기는 커녕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벨라루스 국경 지대에서 회담을 갖기로 한 것에 대해서도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러시아는 군사 지역을 타겟으로 한다고 했지만 어린이를 포함해 태어난지 몇개월도 채 되지 않은 아기들까지도 목숨을 잃었다”면서 “우크라이나 국민을 죽이고 거짓말 한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국민대학교 교환학생 야로슬라바(26·여)씨는 고향이 키예프다. 며칠 전 러시아 미사일이 키예프 한 고층 아파트 측면을 뚫고 지나가는 영상을 보고 충격에 몸을 떨었다. 집이 불과 몇 km 떨어져있어 매일 지나다니던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야로슬라바씨는 “사실상 키예프를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교통이 마비됐고 공항도 피습됐다. 몇몇 친구들은 도시를 지키기 위해 자원했다. 벙커에 피신한 부모님은 매일 괜찮다고 하지만 걱정이 된다. 하루하루가 악몽”이라고 눈물을 비쳤다. 이어 “러시아는 다른 나라도 침공할 수 있는 나라”라면서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우크라이나 정부·국민을 위한 재정·인도적 지원을 포함해 적극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러시아 직접 제재하고 우크라와 연대해달라는 내용의 청와대 청원 동의도 부탁했다.
우크라이나에 연대하는 움직임은 전세계에서 일고 있다. 독일 베를린에서는 전날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는 반전 시위에 시민 최소 10만명이 참석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 50개 도시에서도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시위대 3000여명이 체포됐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5일차에 접어들었다. 우크라이나 내무부는 전날까지 어린이 14명을 포함해 350명 이상의 민간인이 숨졌다고 밝혔다. 부상자는 1684명이고 어린이는 116명이라고 덧붙였다. 푸틴 대통령이 핵 억지력 부대 투입을 언급한 가운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벨라루스 국경 인근에서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