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가 막아선 양재천 벚꽃길이 3년 만에 전면 개방되었다. 오랜 시간 꽃길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양재천을 퇴근길 짬을 내 걷노라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 한철 머무는 나그네새 '밀화부리'가 활짝 핀 벚꽃의 꽃잎을 먹성 좋게 따먹고 있는 풍경을 보노라니 넋을 잃는다. 강요된 단절이기에 유난히도 겨울 시린 추위를 견디고 틔워낸 벚꽃의 망울들이 요란한 폭죽 소리를 내며 만개중이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따라 삼삼오오 꽃그늘을 찾아 든다. 봄날은 왔다.
흐드러지게 만발한 벚꽃이 피고 지는 과정은 사람의 인생과 무척이나 닮아있다. 만고에 영원한 것은 없다. 젊음의 한순간도 정점을 지나 주름진 모양새로 늙어가듯 만인의 눈길을 사로잡던 화려한 벚꽃도 지천에 육신을 흩뿌리며 낙화하고 시나브로 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벚꽃은 유난스레 피어 있는 모습 못지않게 떨어지는 모습도 강렬하다. 꽃잎이 유독 얇고 하나하나 흩날리듯 떨어져, 꽃비가 내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또 금세 활짝 피어 화려하게 물드나 싶다가도 시샘하는 봄비가 내리면 속절없이 저물어 간다. 찰나의 순간으로 사라져버리는 벚꽃의 자태는 짧고 화려하기에 더욱더 잊히지 않는 풍경으로 봄날을 채비한다. 단아한 추억들을 남기고 회색 아스팔트 위로 떨어진 모습을 보면 벚꽃의 시간에 잠시 비를 내려보내는 것을 멈춰줄 것을 하늘에 빌고 싶지만 봄비도 봄을 상징하는 순간이니 벚꽃만 편애하지 않기로 한다. 꽃비도 봄비도 냉기로 느껴지지 않을 때 비로소 진짜 봄이 시작되니 말이다.
지천에 널 부러진 벚꽃에 취해 한적한 교외 공터 꽃그늘에 조막만 한 텐트라도 내려놓으면 벚꽃 잎이 새하얀 눈처럼 소복하게 쌓여간다. 귀를 기울여 꽃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 온갖 잡념에 설쳐 없던 잠도 살포시 다가온다. 커피 안에 은근 슬쩍 내려앉은 꽃잎은 고명처럼 봄기운으로 스며든다. 아, 참으로 호사롭다. 이 얼마만의 자유로운 낭만인가.
이처럼 화사한 벚꽃에는 줄 곳 일본의 국화라는 오해가 덧씌워져 있다. 실상은 일본은 국화가 없다. 따지고 보면 벚꽃의 원산지는 일본이 아니다. 학계의 대체적 의견은 히말라야에서 중국 남서부에 걸친 지역이라는 것이 유력하다. 지구가 수만 년 주기로 한란을 반복할 때마다 동쪽으로, 북쪽으로 분포를 넓혀오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벚꽃은 북미, 유럽 등 북반구 전체에 분포하고 있다. 벚꽃 최애국 일본인들에겐 야속하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한민족이 사랑한 벚꽃이기에 부득불 우리 것이라 주장하는 논거를 제시한다면 왕벚나무는 제주도가 원산지다. 벚나무의 종류는 매우 많은데 그중에서도 풍성한 꽃잎이 화려하게 흩날리는 왕벚나무 품종의 자생지가 제주도인 것이다. 한때 휴대전화 연결 음으로 애용했던 버스커 버스커의 노래 ‘벚꽃엔딩’의“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가사도 분명 왕벚나무의 낙화를 모태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원곡자의 속내를 들어 본 적은 없으나 그러길 바라는 마음이다.
한걸음 더 들어가 보면 고려 시대에 몽골군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기 위해 만들었던 팔만대장경 판의 태반도 벚나무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껍질이 세로로 갈라지는 데 비해 벚나무는 가로로 짧은 선처럼 갈라지면서 표면이 거칠지 않고 매끄러워 정교한 활자를 각인해야 되는 목판으로 더없이 유용했을 것이다. 이 정도 되면 환장하게 푸르른 오색의 봄날, 잠시 벚꽃에 취해 살아도 일본 문화라는 항간의 극단적 오해에서도 자유로울 것이다.
벚꽃은 질 것이다. 사람들의 아쉬움을 뒤로하며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바라 건데 지는 꽃잎의 엔딩처럼 코로나바이러스도 함께 지길 소망할 뿐이다. 이 찬란한 봄날의 끝은 벚꽃 엔딩과 코로나 엔딩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