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연예인 해도 되겠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막연하게 갖던 꿈은 TV 속 소녀시대의 무대를 보고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곧장 서울로 향한 그는 연습생 생활로 10대를 빼곡히 채웠다. 평범한 삶과 맞바꾼 시간들이었다. 학창 시절 추억은 적었고, 남들이 말하는 청춘은 자신과 먼 이야기라 느꼈다. tvN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만나 1998년의 여름을 살게 됐을 때 그는 생각했다. 이게 청춘이라고.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그룹 우주소녀 보나에게 선사한 위로다.
“기억을 조작당한 기분이에요.” 최근 화상으로 만난 보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유림이의 인생을 만나게 돼 정말 다행이에요.” 그는 지난 3일 종영한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펜싱 국가대표가 된 고유림을 연기했다. 가난한 그는 이따금씩 버거운 삶을 이기기 위해 발버둥 친다. 약한 모습은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다이빙대에서, 조용히 뛰어든 물속에서, 혹은 마음속에서, 그는 그렇게 남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운다. 미소녀 펜싱 스타라는 허울 속에 고유림은 늘 고요한 싸움을 이어간다. 보나는 고유림의 단단함에 이끌렸다.
“대본 속 유림이가 정말 좋았어요. 대본만큼만 표현하면 좋겠다 싶었죠. 유림이는 가족밖에 모르는 아이예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벼랑 끝에 서면 고양이가 호랑이에게 덤빌 수도 있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희도(김태리)를 대한다고 느꼈어요. 희도에게 미성숙하게 굴던 걸 깨닫고 사과하는 부분도 정말 좋았어요. 유림이와 희도의 관계가 인상 깊었어요.”
고유림과 나희도는 서로를 미워하다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 두 사람은 모든 걸 포용할 수 있는 사이다. 때로는 문지웅(최현욱)에 대한 애정보다도 우위에 있다. “유림이가 지웅이에게 ‘누가 괜찮냐고 물어봤을 때 안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너뿐’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유림이는 희도에게 가장 솔직하다고 생각해요.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자 넘어야 할 산이니까요.” 보나는 고유림의 마음으로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만들어갔다. 고유림이 가진 고단함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쏟았다.
“유림이는 제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상황과 감정을 겪었어요. 가장 막막하게 느껴졌던 건 다이빙 장면이에요. 촬영 전부터 걱정이 많았어요. 어떤 마음인지 상상도 안 되더라고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수영장 물로라도 뛰어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감정이 교차했어요. 유림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기는 장면도 기억에 남아요. 대본에 눈물 흘린다는 말이 없어도 눈물이 절로 나는 장면도 많았어요. 신기했죠.”
보나는 KBS2 ‘란제리 소녀시대’, ‘오! 삼광빌라!’ 등에서 연기 경력을 쌓았다. 스포츠물은 처음이었다. 펜싱 선수를 잘 표현하기 위해 3개월 전부터 펜싱 훈련에 돌입했다. 보나에겐 이 역시도 특별했다. 바쁜 아이돌 가수의 삶을 제쳐두고 3개월간 펜싱에만 매달렸다. 국가대표 펜싱 선수가 돼야 하는 만큼 정신없이 몰두했다. 긴 시간 뭔가를 쌓아간다는 건 그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런 삶도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에게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몰랐던 걸 알게 한 고마운 작품이자, 첫사랑이다.
“펜싱 금메달리스트잖아요. 그런 만큼 펜싱을 열심히 준비했어요. 방송 3개월 전부터 레슨을 받았어요. 이것도 길지 않나 싶었는데, (김)태리 언니는 저보다 4개월 앞서 펜싱을 준비했다더라고요. 하나씩 쌓아가며 완벽한 나희도가 된 거예요. 그동안 저는 바삐 준비해서 빠르게 결과물을 보여줘야 하는 아이돌 생활에만 익숙했거든요. 태리 언니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촬영 전후 마음가짐도 달라졌어요. 더 다양한 배역을 맡아 여러 경험을 하고 싶다는 욕심도 커졌어요. 전환점이 됐다고 할까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첫사랑처럼 아련하게 마음 한쪽에 남아있을 것 같아요.”
노래와 연기를 부지런히 오가며 그 역시도 성장했다. 가수 활동으로 긴장감은 사라졌고 뭔가를 배우는 속도는 빨라졌다.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는 생각이 넓어지고 뚝심도 생겼다. 보이지 않던 것도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나는 섬세한 연기자로 나아가고 있다. “더 잘 해내고 싶고,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공부하고 싶어요.” 연기 이야기를 하는 보나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면서도 이내 Mnet ‘퀸덤2’ 이야기를 꺼내며 “우주소녀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우주소녀 활동과 연기 모두 보나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또래보다 조금 늦은 스물둘에 데뷔했어요. 보나의 스물하나는 데뷔 문턱을 넘기 위해 치열히, 조급하게 달렸던 기억만 가득하죠. 그리고 스물다섯은… 조금은 즐기게 됐다고 할까요? 원하던 걸 이뤄내던 시기였어요. 섬머 스페셜 앨범을 내고 싶었는데 ‘부기 업’을 발표했고, 처음으로 해외 로케이션 뮤직비디오도 찍어봤어요. 음악방송에서 첫 1위도 해봤죠. 그런 시기를 거치면서 지금 주어지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게 최고라는 걸 깨달았어요. 일어나지 않은 일에 고민하기보다는 현재에 집중할 거예요. 지금의 저는 연기를 더 잘하고 싶어요. 무대도 잘 해낼 거예요. 이제 당분간은 우주소녀로서 멋진 모습을 보여드릴게요. 기대 많이 해주세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