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 100일을 넘겼다. 보건의료계 현장에서는 여전히 규정이 모호하고, 처벌이 과도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는 처벌이 아닌 예방에 초점을 맞췄다며 과도한 우려라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고용노동부(노동부)가 주무부처로서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26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12층 그랜드볼룸에서 쿠키뉴스가 주최한 2022 미래행복포럼 ‘중대재해법, 보건의료계 안착하려면’ 토론에서는 보건의료계·시민단체·전문가와 노동부 관계자가 모여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논의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에게 발생한 ‘중대산업재해’와 공중이용시설이나 교통수단에서 발생한 ‘중대시민재해’에 대해 사업주 혹은 경영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게 한 법이다. 지난 1월27일 시행됐다.
보건의료계도 산업재해 안전지대가 아니다. 지난 2019년 설 연휴 병원을 지키다 과로로 숨진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 그리고 지난 2018년 병원 내 집단 괴롭힘, 이른바 ‘태움’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박선욱 간호사가 산업재해 판정을 받았다.
병원은 중대산업재해뿐만 아니라 중대시민재해도 대비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연면적이 2000㎡ 이상이거나 병상수가 100개 이상(의료법 제 3조제 2항 제1항에 따른 의료기관)인 의료기관, 그리고 연면적 1000㎡ 이상인 노인요양시설은 공중이용시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에 중소병원을 중심으로 중대재해처벌법 대응에 어려움을 토로하며 적용 대상에서 제외해달라는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
제약바이오 업계에서도 난색을 표한다. 의약품 특성상 언제든 중대시민재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의약품의 경우 이미 약사법과 식품의약품안전처 관리감독하에 원료 점검과 관리를 별도로 이행해왔다는 점에서 이중 처벌 우려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은솔 한국제약바이오협회 변호사는 “불가피하게 발생한 의약품 안전사고에 대해 현행 중대재해처벌법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기업의 신약 개발 의지를 꺾어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과학·기술 또는 법령상 기준에 따라 원료 또는 제조물 안전성이 결여됐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되지 않도록 명시하는 입법적 보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중대재해 판별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고도 제언했다. 김 변호사는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이 처벌을 받고 안 받고 그 기준을 알 수가 없다는 게 부담감의 본질이다. 근로감독관마다 해석도 다 다르다”면서 “노동부가 주무부처로서 책임감을 갖고 명확한 기준을 시장에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부는 중대재해처벌법 입법 취지가 처벌이 아닌 중대재해 예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 현장에서 법이 잘 시행되기 위해 관리 감독자 역할이 중요하다고 봤다. 남덕현 노동부 중대재해산업감독과 사무관은 “중대재해처벌법이 산업안전보건법과 상충하는 부분이나 법령상 해석이 모호한 부분 등은 앞으로 노동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본다”고 했다.
조기홍 대한산업보건환경연구원 실장은 “안전보건 분야에서 30년 넘게 종사했지만 요즘처럼 산업 안전 보건에 관심이 집중된 적이 없었다. 이전에도 산업안전보건법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많은 기업들이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서야 산업재해 대응에 나선 이유는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가 처벌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면서 “안전한 환경이 조성돼 작업자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대재해를 예방하고자 하는 사업주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손질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둔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 중대재해처벌법 때문에 해외 자본의 국내 투자가 이뤄지기 어렵다면서 관련 시행령을 다듬어 합리적으로 집행되도록 하겠다고 발언했다. 한덕수 신임 국무총리 역시 지난 25일 “산업 안전 재해를 줄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그 목적에 아무런 논쟁이 있을 수 없지만 방법론이 적절한지 들여다봐야 한다”고 언급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