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의료인에 대한 보복성 폭력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용인과 부산 소재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상해‧방화 등의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며 의료진과 환자들의 안전을 위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한병원협회는 11일 국회에서 ‘안전한 응급실 진료환경 개선방안 모색 토론회’를 열고 응급실 폭행 방지대책, 제도적 개선 방안 등을 논의했다.
의료계에서는 관련 법안이 있는데도 응급실 폭행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을 두고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2018년 12월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임세원 교수가 숨진 사건을 계기로 의료인을 폭행하는 가중처벌하는 이른바 ‘임세원법’이 제정됐지만, 여전히 의료진들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김원 제주한라병원 부원장(권역응급의료센터장)이 공개한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의료기관의 폭력 범죄 건수는 △2016년 1818건 △2017년 1729건 △2018년 2524건 △2019년 2522건 △2020년 2194건으로, 한해 평균 2000건에 육박한다. 특히 경찰에 접수된 응급실 범죄 건수는 2009년 42건에서 2018년 490건으로 10년 새 11.7배 증가했다.
이는 의료진 역시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2020년 대한응급의학의사회 조사 결과, 지난 1년간 폭언을 경험한 의사는 83.5%로 조사됐다. 폭행을 경험한 의사도 18.1%에 달했다.
폭행이 발생한 원인은 의료기관 종별로 차이를 보였다. 병원급은 환자 또는 보호자의 음주 상태로 인한 폭행이 45.8%, 의료진의 진료 결과에 불만을 품고 저지른 범행 비율이 20.3%였다. 대기시간 및 순서 불만도 5.7%로 뒤를 이었다. 의원급의 경우 의료인 진료 결과 불만으로 인한 범행 비율이 35.6%로 가장 많았다. 음주상태에서 이뤄진 폭행 22.2%, 의료기관 진료비용 불만 8.9% 순이었다.
김 부원장은 제도를 손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반의사 불벌죄 삭제, 환자 및 보호자의 응급실 출입 제한, 주취자의 심신장애자 불벌 규정 미적용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처벌 강화를 위해 ‘가중 처벌’ 및 ‘형량 하한제’ 도입, 의료진 위해행위 무관용 처벌, 현장 대응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특히 응급실 주취 폭력을 근절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조인수 대한병원협회 경영부위원장(한일병원장)은 “응급실 주취 폭력이 50% 가까이 된다. 이외 진료결과 불만이나 대기시간에 의한 폭력은 시스템 상으로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주취 폭력만이라도 근절할 수 있는 대안이 나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임세원법 제정으로 의료기관에 보안인력이 배치되고 있지만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며, 보안인력에 대한 교육과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고도 했다. 조 부위원장은 “현재 보안인력들도 전문성이 부족하고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도 없다. 권한도 전혀 없어서 멱살이라도 잡으면 바로 구치소에 간다”며 “교육 시스템과 권한 강화,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찰력 상시 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조진석 변호사(법무법인 세승)는 “사전 예방적 측면에서 응급의료기관에 상황 예방과 대응을 위한 경찰력 상시 배치가 필요하다”며 “청원경찰 배치의 인건비 등 비용도 의료기관이 온전히 부담하기 보단 국가나 지자체 분담으로 재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경찰 현장출동에 현실적인 한계가 있는 탓이다. 주진우 경찰청 범죄예방정책과장도 “경찰이 신속하게 출동하고 있지만 5분 안에 도착한다고 해도 그 사이 여러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청원 경찰 등 현장에서 의료기관이 자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책”이라며 “의료인에 대한 폭력에 대해선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 엄정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인식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정성필 대한응급의학회 학술이사(연세대 강남 세브란스병원 교수)는 “미국은 응급실 폭력을 의료계만의 문제로 보지 않고 ‘작업장 폭력(Work place violence)’이라는 큰 범주로 보고 있다”며 해외 사례를 소개했다.
또한“ 미국 응급의학대학(ACEP)은 ‘최적의 환자 치료는 환자, 의료 종사자 등 모든 사람이 보호될 때만 달성될 수 있다’는 슬로건 하에 의료 종사자에 대한 폭력에 대한 인식 제고에 주력하고 있다. 미국 응급간호협회(ENA)도 ‘응급실에서 폭행당하는 것이 더 이상 일의 일부로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인식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윤동섭 대한병원협회 회장은 “임세원법이 생겼지만 의료기관 내에서의 의료진을 향한 폭력 등 불미스러운 행위는 근절되지 않았고 의료진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며 “현장에서의 대응 매뉴얼과 교육, 필요한 지원 방안이 무엇인지 검토해서 안전한 진료 환경이 마련될 수 있도록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필수 대한의사협회 회장도 “그간 의료계에서 정부와 국회에 현장 의료진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안전한 진료 환경을 마련해 줄 것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의료계의 합리적 대안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결국 의료진들이 끊임없이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며 “의사 회원들이 안전한 의료 환경에서 진료할 수 있도록 관련 대책들을 정부와 협의해 현장에서 실효성 있게 적용되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의료진 뿐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 입장에서도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윤명 소비자시민모임 사무총장은 “끊임없는 응급실 의료인 폭행과 같은 사항으로 국민 불안과 환자 안전까지 위협받고 있다. 응급실 의료인 폭력 사태는 의료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의료인이 담당하고 있는 환자의 안전과 의료기관의 안전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실효성 있는 처벌과 함께 응급실 진료 환경이 근본적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응급실 내부가 복잡하고 대기시간이 길고 중증도 환자 분류‧관리체계 불분명, 의료인 부족 등으로 환자나 보호자의 불만이 발생하게 된다. 응급실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며 “이는 의료기관이 환자에게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결돼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보건복지부는 안전한 응급실 환경 조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은영 복지부 응급의료과장은 “기존 제도가 현장에서 실효성을 높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인 것 같다. 환자 보호자의 소지품 검사를 하는 등 현실적인 대책을 찾아나갈 것”이라면서 “앞으로 계속적으로 검토하며 법을 보완해나가겠다”고 했다.
국회 역시 제도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21대 전반기 국회에서 보건복지위원장을 맡은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의료현장에 대한 보호는 결국 국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며 “그동안 보건의료분야의 작업장 폭력에 대한 이슈는 지속돼 왔고 실효성 있는 제도개선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전 문화 인식 확산부터 정확한 실태조사와 법적 개선방안까지,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의사 출신 신현영 민주당 의원도 “임세원법이 만들어진 이후 여러 방안이 나왔지만 현실적으로 실효적인 변화가 있진 않았던 것 같다”며 “의료진에게 병원이 ‘안전한 일터’가 될 수 있도록 의료기관 역시 보호장치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기대한다. 안전한 응급실을 제도적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 국회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은빈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