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다.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도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폭력이 전염됐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폭력에 새로운 폭력이 더해져 점점 진해진다. 멀리 떨어지면 다른 광경이 보인다. 폭력이 태어나고 자라서 활동하기 좋은 환경과 환경을 방치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평범하고 평화로운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겉으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도 모른다.
‘인플루엔자’(감독 황준하)는 전국에 신종 전염병이 확산하는 시기, 이제 막 3개월차가 된 간호사 다솔(김다솔)이 병원에서 겪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다솔은 선배 간호사들이 가하는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을 하루하루 버티며 일한다. 일을 그만두려고 해도 또 다른 폭력이 막는다. 절대 선배들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다솔 앞에 신입 간호사 은비(추선우)가 나타난다. 후배지만 언니라고 부르며 잘해주려던 다솔에게 연이어 사건이 벌어진다.
폭력이 뿜어내는 자극에 취하지 않은 영화다. 폭력이 대물림되는 구조를 다룬 영화들은 구조 안에서 개인이 겪는 극단적인 상황과 폭주하는 자극적인 면을 영화적으로 활용했다. ‘인플루엔자’는 시종일관 담담하다. 인물 가까이에 다가가 감정이 담긴 표정과 말, 행동들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대신, 거리를 두고 그저 지켜본다. 마치 언제, 어디든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폭력이 전염되는 순간을 보는 대신 다른 걸 보게 하는 태도로 영화의 메시지를 드러낸다.
영화는 인물이 처한 환경을 비춘다. 다솔이 왜 오도 가도 못 하고 매일 지옥을 가는 마음으로 출근하는지,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에서 어떻게 이런 폭력이 벌어지는지, 이 모든 일이 왜 반복되는지 보여준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피해자인 이유를 전염병에 대한 비유와 어쩌면 겪을 수 있었을지 모르는 환상 장면들로 설명한다. 현재와 과거 시점을 다른 화면비로 교차해서 보여주는 방식 역시 영화가 담은 메시지에 더 집중하게 한다.
“넌 안 그럴 것 같아?”란 물음에 “전 안 그럴 것 같아요”라고 답하는 인물을 그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솔은 적극적으로 폭력의 대물림을 끊으려 한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미래를, 타인을 생각하는 다솔은 영화의 유일한 희망이다. 희망이 절망으로 빠르게 바뀌는 순간들을 지켜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저항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에 더 주목하게 한다. 폭력을 단절하고자 하는 개인의 용기가 말살되는 것 또한 폭력이란 걸 알려준다.
신인 감독 황준하의 장편 데뷔작으로 지난해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다. 2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