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8월. ‘안악사건(105인 사건)’으로 5년여간 형무소 생활을 하다 출감한 김구(1876~1949)가 그해 여름 황해도 안악군 집으로 돌아왔다. 앞서 얘기했듯(‘김구, 헌병보조원 첩이 된 처형 등 '처가 월드'에 절레절레’ 편 참조) 사이가 나빴던 장모와 처형까지도 기뻐 눈물을 흘리며 반겼다.
그러나 안악 헌병경찰대는 김구를 요시찰 명단에 올려놓고 밀착 감시했다. 정기적으로 헌병경찰대에 출두해 반일을 꾀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조선총독부 헌병경찰대로서도 거물급 사상범 김구를 대하기가 여간 골치가 아니었다.
어찌 됐든 김구는 헌병경찰대에 속내를 숨겨야 했다. “아무 기술도 없다”라고 한 것은 안신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낼 것이니 너희도 안심해라 하는 방책이었다.
“김 상도 아시겠지만 특사로 풀려난 죄인이 사회 활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하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김 상이 자신의 처지를 잘 알 것으로 믿소. 더는 대일본제국에 누가 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소. 안신학교 근무는 알아서 하길 바라오.”
안악 헌병경찰대장이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김구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에게 알렸다.
“여보 잘 됐어요. 정말 잘 됐어요. 어머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열세 살 어린 아내 최준례(1889~1924)가 환한 얼굴로 기뻐했다. 김구가 출옥 후 임신한 최준례는 볼록한 배를 내밀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두 딸이 죽고 셋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김구는 안신학교 보조 교사가 됐다. 아이들에게 우리 말을 가르치고 숫자놀이도 했다. 삐걱거리는 책상과 걸상도 고쳤다. 또 급할 때는 학교 행정업무도 봤다.
안신학교는 황해도의 대지주 김효영과 그의 손자 김홍량(1885~1950) 등이 김구 등과 연합해 해서교육총회를 조직, 양산학교·종산학교 등을 운영해 나간 학교 중 하나다. 김구는 이들 학교 순회 교사를 하며 해서교육총감을 지내기도 했다.
최준례는 비로소 가정의 평화를 찾은 양 들떠 지냈다. 더구나 헌병보조원 첩질한다며 칠색 팔색했던 언니에 대해 남편이 감싸 안았으니 그 기쁨은 더할 나위 없었다.
‘당시 장모는, 정절을 잃고 헌병보조원 첩이 되었다가 폐렴이란 중병을 얻은 큰딸과 다시 동거하면서 생활할 길이 없어 곤란하던 차에 (출옥했다는) 내 편지를 보고 좋아라 하고 염치도 돌아보지 않고 병든 딸을 데리고 우리 집에 들어왔다…미움보다 연민이 느껴져 다 같이 살았다.’(‘백범일지’ 중·도진순 주해본)
조선 남자 김구가 ‘백범일지’에 어머니 곽낙원 여사에 대한 불효의 마음은 많은 부분을 할애했지만 아내와의 애틋한 표현은 최대한 삼갔다. 채신머리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여성 아내 최준례는 결혼 후 가정다운 가정을 꾸린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 교실에서 운동장을 보면 덩치 큰 남편이 아이들과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생겼다. 이대로만 산다면 부러울 게 무어 있겠는가.
‘(그 사이) 여식 은경(1916~1917)이가 사망하고 처형 역시 사망하여 그 지역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무오(1918년) 11월에 (아들) 인(1918~1945·독립운동가)이가 출생했다. 인이가 태중에 있을 때 어머님 소망은 물론이고 여러 친구가 생남하기를 바라는 것은 나의 나이가 40여에 더욱 무매독신(無媒獨身)으로 자식이 없음을 우려함이라…’(‘백범일지’ 중·김학민 이병갑 주해)
김구·최준례 부부는 연이어 세 딸을 잃었다. 유아사망률이 높던 시대이긴 했으나 드물게 자식 복이 없었다. 더구나 김구 집안 형제가 명이 짧아 제사 지낼 후손도 없었으니 곽낙원 여사가 젊은 며느리에 바라는 바가 컸다. 그런데 아들이 태어났다.
“아주마님 손자 장가 보낼 제 제가 후행(혼례 때 가족 중에서 신랑이나 신부를 데리고 가는 사람)가요.”
신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김구의 종형제 김용제(1878·독립운동가)가 곽낙원 여사에게 기쁨에 넘쳐 말했다.
신이가 태어나고 백일 무렵이었다. 사내대장부로 우국 충심을 누르고 살아가던 김구에게 장덕준(1892~1920·동아일보 순직기자)이 1919년 2월 인편을 보내 경성 소식을 알린다. 국가대사(3.1만세운동)가 발생할 터이니 자신이 재령(장덕준의 고향)에 가면 거사를 논의하자는 서신이었다.
그러한 낌새를 눈치챈 헌병경찰이 김구를 예비 검속할 기세로 그의 집과 그가 농감으로 일하는 안악 동산평을 감시했다. 벌써 젊은 청년들이 김구에게 “선생께서 (만세운동) 창도해 주셔야 합니다”하고 따랐다.
“독립만세만 불러서는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사를 계획 진행하여야 할 터인 즉 나의 참여와 불참 문제가 아니니 어서 만세를 부르라.”
김구는 그렇게 청년들에게 알린 뒤 사찰을 따돌리기 위해 동산평 농장으로 돌아와 작인들을 지휘하며 제방 공사를 하는 척했다. 그러자 그들이 안심하고 안악 유천리 주재소로 돌아갔다.
김구는 작인들에게 이웃 동리를 다녀오마 하고 안악 읍내를 거쳐 재령을 지나 사리원역에서 열차로 탈출을 시도했다. 해외 무장투쟁 등을 통한 장기적인 싸움을 준비했던 것이다.
남편 출옥 후 행복했던 아내 최준례
최준례의 행복은 그렇게 4년여 만에 끝나고 말았다. 이내 3.1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다. 그는 어린 아들을 안고 낙심한 시어머니 마음을 위로하며 초조한 날을 보냈다. 남편이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장이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2년(대한민국 임시정부 2년, 1920년)에 가처(최준례)가 (아들) 인이를 데리고 건너와 동거하였고 내지에는 어머님이 장모와 같이 동산평에 계시다가 장모 또한 별세한지라, 역시 그곳 공동묘지에 안장하고 4년에 이곳으로 와서 취미(재미) 있는 가정을 이루었다. 그해 8월 신(1922~2016·독립운동가⋅공군참모총장)이가 태어났다.’(‘백범일지’ 중)
그러나 앞서 얘기했지만('상남자' 김구, 열세 살 어린 아내의 '고단한 순정' 편 참조) 일제 식민지가 된 나라의 망명 정부와 그 요인들이 그 먼 땅에서 살아가기란 매일 긴장의 연속이었다. 상해만 해도 일본영사관과 그들의 세력 범위가 그 어느 나라 조계보다 넓었다. 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 안에 있었고 망명 가족이 공동체를 이뤄 살림해야 했다. 누가 밀정인지, 누가 배신자인지 알 수 없었다.
최준례는 그 망명지에서 세 살배기 아들 인과 신생아 신을 양육해야 했다. 남편은 아이들 얼굴 한 번 들여다볼 틈이 없었다. 자신보다 두 해 늦게 상해로 온 시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둘째 아들 출산 때 몸조리가 어려웠을 것이다.
곽낙원 여사는 아들이 상해로 망명하고 일제로부터 수난을 겪었다. 헌병경찰이 수시로 그들을 괴롭혔다. 며느리마저 그 귀한 손자 인과 상해로 떠난 후 남은 사람은 병든 사돈뿐이었다. 그 사돈 ‘김 부인’은 전형적인 서울내기였다. 의사 사위를 두고 한때 기세 있게 소비하며 살던 사람이었다. 아들이 김 부인을 미워했으나 자신이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두 사돈은 김구가 농감을 했던 안악읍 남쪽 10여 킬로미터 지점 동산평 농장에 늙은 몸을 의탁했다. 김구와 해서교육운동을 함께 했던 김홍량 가의 배려 덕이었다. 그 동산평에서 아들(사위)과 딸(며느리)을 그리워하며 의지하던 사돈 간이었는데 덜컥 ‘김 부인’이 병세가 악화하여 죽고 말았다.
김구 최준례 부부는 비선을 넣어 홀로 있는 곽낙원 여사를 상해로 모셨다. 이를 두고 김구가 ‘취미 있는 가정을 이루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1924년 1월 1일 상해.
시어머니의 산후조리를 받아 원기를 회복해 나가던 최준례가 사고를 당한다.
‘처는 신을 낳고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고 (상해) 영경방 10호 2층에 살 때였다. 세면수를 어머님께서 버려달라고 하기가 황송했는지 세숫대야를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뎌 계단으로 굴러 버렸다. 그 빌미로 늑막염이 폐병으로 되어 서양인이 경영하는 홍구(홍커우·일본세력권)의 폐병원에서 사망했다. 내가 그곳에 갈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프랑스 조계지 입원 병원) 보륭의원에서 나는 최후의 작별을 하였다.’(‘백범일지’ 중)
최준례는 그렇게 서른다섯의 나이에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어린 딸 셋을 먼저 보냈고 어린 두 아들을 남긴 채였다. 시신은 상해 숭산로 포방(구치소) 뒤편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교회법을 어기며 김구를 사랑했던 신여성
‘나의 뜻은 우리가 독립운동의 기간에 혼장(婚葬)의 성대한 의식으로 금전을 소모함을 불찬성하였으므로 가처의 장례는 극히 검약하게 하기로 하였으나 여러 동지들이 가처가 이왕부터 나로 인하여 무쌍한 고생을 겪은 것이 즉 국사(國事)의 공헌이라 하여 나의 주장을 불허하고 각기 돈을 내어서 장례도 성대하게 지내었고 묘비까지 세웠다’(‘백범일지’ 중)
백범을 너무 사랑하여 교회법을 어기며 그와 결혼했던 신여성 최준례. 열세 살이나 많은 우락부락한 상남자와 결혼한 죄로 긴장의 나날을 살며 옥바라지를 했던 신부. 장서 갈등에 내가 먼저 친정과 인연을 끊겠다면서도 친정 식구들을 챙겼던 착한 여자.
상해 임시정부에 들끓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에게 어떻게든 먹이려고 주방을 떠나지 못했던 독립운동가의 아내.
딸 셋을 연속 잃고도 의연했던 강한 엄마,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사고를 당해 병상에서 눈물만 흘리던 젊은 어머니. 그는 끝내 젖먹이 둘째 아들을 두고 눈을 감았다.
‘신이...아직 젖 먹을 때라 먹는 것은 우유를 사용하나 잘 때는 반드시 할머니 빈 젖을 물고야 잠이 든다. 차차 말을 배울 때는 단지 할머님만 알고 어머니가 무엇인지 모른다.’(‘백범일지’ 중)
그런 김구는 홍커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쾌거(1932년)가 있고 난 뒤 현상금 60만 원이 걸린 수배자가 되어 복식과 이름을 바꿔가며 도피 생활한다. 살얼음판을 걷는 도피 생활이었다. 그를 따르던 도피 주선자가 홀아비인 김구에게 권한다.
“김 선생의 피신 방법에 좀 문제가 있습니다. 김 선생은 홀아비이신데 나의 친우 중 과부로 나이가 서른쯤 된 중학교 교사가 있는데 보시고 뜻이 맞으면 처로 맞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김구는 거절한다. 그리고 1949년 6월 2일 안두희에 의해 저격 당해 운명하기까지 최준례의 남편으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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