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나비학자 석주명(1908~1950).
“나는 논문 한 편을 쓰기 위해 16만여 마리의 나비를 분석한 적이 있습니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연구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던 일제강점기 ‘조선인 천재 학자’였다. 1939년 영문 저작 ‘조선산 나비 총목록’이 발간됐을 때 세계 생물학자들이 ‘조선의 석주명’을 주목했다. 한국인 과학자가 한국사 처음으로 영문 연구논문을 영국왕립학회 명의로 낸 것이다.
우리나라 과학계에서는 석주명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노벨생리학상을 탓을 거라는 얘기가 있다. 석주명은 죽기 직전까지 ‘변이’를 주제로 한 유전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 성과가 노벨생리학상에 닿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 충무로 3가 즈음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석주명은 기초 학문의 필요성을 알게 한 한국근대사의 과학자였다. 일제강점기 양주동의 ‘조선 고가 연구’, 최현배의 ‘우리말본’과 함께 석주명의 ‘조선산 접류 총목록’은 3대 역저로 불린다. 그는 또 오직 실력으로 일본 학자들을 눌렀으며, 생물학임에도 국학을 기반으로 탐구하며 민족자존을 세운 학자였다.
곤충학만이 아니라 ‘제주도방언집’ ‘에스페란토 소사전’ 등을 출간한 언어학자, 한국산악회를 출범시킨 산악인, ‘대동여지도’를 작성한 김정호처럼 한반도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안 가본 데가 없던 우리 땅 탐험가이기도 했다.
이런 석주명은 평양 대동문 근처 이문리 출생으로 기독교계 숭실고보에 다녔다.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들려오자 보통학교 학생이던 조선 어린이들도 시위 행렬에 참여하여 소리 높이 외쳤다. 나는 이 일에 자극받아 졸업하고는 조선 정신을 넣어 주는 숭실고보를 택하여 입학했다.”(석주명 회고 중)
그러나 그의 학창 시절은 일제의 조선 교육 압살 정책으로 민족계열 학교들이 명맥 유지가 힘든 시기였다. 일제는 숭실고보 교장 모우리(미국북장로회 선교사)를 ‘105인 사건’ 배후로 지목, 용수를 씌어 투옥시켰을 정도다. 민족계열 학교와 학생들은 일제에 동맹휴학으로 맞서며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석주명은 어머니 치마바람에 이끌려 1922년 개성 송도고보로 전학한다. 이 학교는 함흥 영생중학(함남) 고창고보(전북) 동래고보(경남) 등과 함께 민족계열 지방 신흥 명문이었다. 송도고보는 와세다대학보다 큰 교정에 이화학관(理化學館)까지 갖춘 학교였다. 그러니 학구파 석주명에게 지식충전소나 다름없었다. 학교 운영은 미국 남감리회의 재정지원으로 이뤄졌다. 미국식 커리큘럼이 적용됐다.
그런데 송도고보로 전학한 석주명은 그 천재성이 엉뚱하게 ‘딴따라 기질’로 나타났다. 저 스스로 자신의 노래에 반해 음악학교 진학을 목표로 세우고 기타만 쳐댔다. 기숙사 동창들이 시끄럽다고 하면 황진이 놀던 곳을 찾아다니며 그곳에서 깽깽이를 켜댔다. 그러니 성적이 반에서 꼴찌였다.
물론 그는 숭실고보 시절에도 ‘딴따라 기질’이 ‘신극’ 활동으로 드러났지만 성적은 좋았다. 그때 동창 안익태(1906~1965·작곡가)가 첼로, 길진섭(1907~?·서양화가·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 아들)이 무대 미술, 김태선(1903~1979·1950년대 서울시장)이 배우 등으로 신극 활동을 같이 했다. 계몽운동 차원이 무대였다. 석주명은 만돌린 연주자였다.
그렇게 재기발랄하던 석주명이 평양보다 작은 도시 개성의 송도고보에서 성적표를 받아 들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방학임에도 평양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룻밤을 뜬눈으로 새운 그는 하숙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책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석주명이 일제강점기 ‘세계적인 나비학자’ ‘조선의 파브르’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은 맹모삼천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 김의식(1881~1938)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하숙 방문 닫고 ‘공부에 미쳐 버린’ 아들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는 무학의 어머니였다.
석주명 연구가 이병철은 “열여섯에 석주명 아버지 석승서의 후처로 시집온 김의식은 자녀 교육에는 무심한 남편과 달리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농업전문학교인 가고시마고등농림(현 가고시마대학)의 관문을 조선인 학생으로 유일하게 진학시킨 강한 어머니였다”라고 했다. 후처였으나 인고의 길을 묵묵히 견디며 석주명 학문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김의식은 무당이 “후처로 가지 않으면 단명한다”라는 점괘에 석승서의 후처가 됐다. 한데 석승서의 본부인이 죽자 선처(先妻) 제사까지 받들어야 했다. 또 김의식이 후처로 들어오기 전 시숙 내외가 죽어 그들 3남매를 떠안고 키웠다. 그렇게 양육해 혼인까지 시켰는데 그중 한 조카가 남매를 두고 죽었다. 남편을 잃은 조카며느리는 개가해 버렸고 김의식은 질손까지 키워야 했다. 시조카 3대손을 길러낸 것이다.
사실 석승서는 평양 제일 요릿집 우춘관을 경영하는 손꼽히는 부자였다. 우춘관은 대동문 안쪽에 일본식 3층 건물이었는데 룸만 50여 개였다. 가기(歌妓)와 무기(舞技)가 수십 명이었다. 이들이 1930년대 평양권번(평양기생조합)을 만들 정도였다.
그러니 석주명의 ‘예능 기질’은 몸에 밴 것일 수 있다.
김의식은 친자녀 네 남매를 두었다. 그 자녀 중 한 사람이 한국복식사의 개척자 석주선(1911~1996·석주선기념박물관장)이다.
한편 석승서는 만주 등 해외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독립자금을 대다가 일경의 감시를 받게 됐다. 그리고 일경의 눈을 피해 밖에서 생활하다 소실을 얻게 된다. 석승서는 죽기 전 15년간 김의식과 사실상 따로 살게 된다.
석주명은 그렇게 어머니라는 ‘여자의 일생’을 지켜보며 자랐다. 그 어머니를 늘 마음 아파했다.
한국의 과학자가 처음으로 펴낸 영문학술 저서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조선산 접류 총목록)’ 첫 페이지에 석주명은 이렇게 썼다.
‘To the memory of my mother who was incessantly interested in my work during her life’ (평생토록 나의 연구를 변함없이 도와주신 어머님의 영전에 바칩니다.)
이 영문은 어머니 김의식이 공부에 미쳐 사는 아들을 위해 황소 한 마리 값으로 치르고 산 영문 타자기를 가지고 쓴 것이다. 무학의 어머니가 영문 타자기라는게 무엇인 줄 알았으랴. 이 타자기는 지금도 용인 단국대 내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석주명은 6·25전쟁으로 인민군이 서울을 접수했는데도 피난 갈 생각하지 않고 연구실에 박혀 ‘워커홀릭’의 삶을 살았다. 그런 석주명에게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어머니'는 알아도 '여자'를 모른다는 것이다. 여자는 다 ‘어머니’ 같은 줄 알았고, 아내는 당연히 ‘어머니의 삶’처럼 사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니 그가 부부 싸움에서 난투극을 벌이고 서울 만리동 집에서 내복 바람으로 남동생이 사는 동대문까지 뛰어 피신하는 상황이 벌어질 줄 알았겠는가. 석주명 부인은 평양제2고녀 육상 선수 출신으로 체격도 컸고 성격도 남성 이상으로 활발했다.
이 부부는 신혼여행 기차 칸에서부터 격렬한 ‘사랑과 전쟁’을 벌였다.<하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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