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전 11시 30분쯤 경부선 부산행 열차가 대전을 지나 대전군 외남면 신대리 부근을 지나갈 때 어떤 자가 3등 차실에 돌을 던져 유리창이 깨어졌으므로 열차는 즉시 3분간 정차하고 범인을 체포코자 하였으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이에 열차는 그대로 부산 방향으로 달렸다. 이 소동은 조선 총독이 귀임하는 날이라 일반 경계가 극도로 엄중하던 중 이 급보를 접한 대전경찰서에서는 중대사건으로 보고 즉시 비상 수색에 나서 범인을 체포하였다.
범인은 12세의 소년으로 대전군 외남면 부사리에 거주하는 황달술이라 하며 투석한 의사를 조사한 즉 여러 아이와 같이 놀다가 장난으로 그리한 것이라 하더라. (출전 동아일보)
■해설
12세 조선 소년 황달술이 ‘뜻하지 않게’(?)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사건이다. 지금의 대전역에서 부산 방향 2km 지점 철로에서 벌어진 일이다. 현 대전시 신흥버스터미널(당시 신대리) 부근이다.
이 달술 소년은 집이 부사리(현 한밭종합운동장 일대)였는데 아마도 달리는 기차 구경을 하기 위해 집에서 1km쯤 떨어진 신대리 철로까지 와서 놀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진 것이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일제는 우리의 전통 읍치 벗어난 곳에 기차역을 세웠다. 성리학에 사로잡힌 유생들은 기차 바퀴 쇳소리에 조상귀신 놀란다며 읍내 기차역 설치를 실력(?)으로 밀어내기도 했다. 공주역이 생기지 않고 허허벌판에 대전역이 생긴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무튼 일제의 수탈을 위한 철로 건설은 우리 민족에게 복합적 감정을 드러나게 했다. 달리는 열차 투석은 복합적 감정의 행위 일단이다.
일제 헌병경찰대 갑호 비상 걸은 조선 소년들
그런데 달술 소년 투석은 일제 헌병경찰대에 갑호 비상을 걸만큼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 열차에 조선의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1919~1927 재임)가 타고 있었다. 아마도 경성역에서 탑승 부산역에 하차, 본국에 가서 일을 보려 했을 것이다. 사이토는 5대 총독(1929~1931)도 지냈던 자로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만큼이나 악명이 높다.
조선 소년들이 던진 돌에 사이토가 탄 열차의 유리창이 박살났다. 경호원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더구나 사이토는 1919년 9월 부임하던 해 남대문역(경성역)에서 강우규(1855~1920) 의사가 던진 영국제 폭탄에 파편화 될 뻔했다.
폭탄을 던졌으나 처단에 실패한 강우규는 이듬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지금 서울역 광장에 그의 동상이 우뚝하다.
이 황달술 어린이의 투척 사건은 어떻게 처리됐는지 알 수 없다. 보도 검열이 삼엄한 때라 정말로 이 소년이 그랬는지 아니면 식민 지배에 분노한 청년들이 그랬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소년들이 놀던 경부선 철로는 지금도 그대로고 그 일대는 논밭 대신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