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수씨는 초등학교 교감이고 아이들 둘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그 집에서 아침에 출근하지 않는 사람은 후배 K뿐이다.
“잘 지내지? 별일 없니?”
“어 형! 소파에 앉아 잠깐 졸았는데 벌써 점심때가 다 됐네.”
“점심 먹어야지. 난 방금 ‘짜파게티’ 해서 먹었는데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더라.”
“형! ‘짜파게티’는 프라이팬에 식용유 두르고 돼지고기 간 거랑 양파 넣고 달달 볶아서 고명으로 얹어 먹으면 맛있어.”
매번 느끼는 거지만 K는 요리에 관심이 많다. 축 처져 있던 사람이 요리 얘기 나오니까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 몇 년 전에도 우연히 K가 끓여준 라면을 먹은 적이 있는데 대파, 고추 등 라면에 첨가하는 음식 재료를 다루는 손길이 무척 섬세하고 정성스럽다고 느꼈다. 외모는 산적같이 우락부락한 사람인데 속은 한 없이 부럽고 섬세하다.
어제 K와 다시 길게 통화했다. 이번에는 사전에 소위 꼰대 세대의 일상을 취재한다는 취지를 설명하고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K는 흔쾌히 허락했다. 아래는 은퇴한 60대 초반 남자가 일상에서 어떤 느낌으로 살고 있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요즘 사는 게 어떠니? 가족들이 집에서 논다고 무시하거나 하진 않니?”
“크게 좋을 것도 크게 나쁠 필요가 없는 상태야. 가족들이 무시하진 않는데 가끔 화가 치밀 때가 있어.”
“어떤 때 주로 화가 나니?”
“아내나 아이들이 내가 집안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때. 평소에는 아내가 내 자존심을 생각해 조심하는 데 가끔 무의식중에 당연하다는 듯이 나에게 집안일을 시킬 때가 있어. 마치 학생한테 시키듯이. 주로 그런 때 화가 나지.”
“집안일은 주로 네가 하니?”
“아내는 학교 일에 전념하면 집안일은 신경을 못 쓰는 사람이야. 청소나 분리수거 등 집안일과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 집에 가서 쓰레기 내다 버리고 일주일 치 장을 봐다 드리는 일 등 주로 주부와 며느리 역할을 내가 다 하는 편이지. 아내도 자기가 못하는 일들을 내가 해주니까 고마워해.”
“아이들도 아빠가 집안일 하는 것을 좋아하니?”
“아이들은 내가 집안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 아직은 내가 밖에 나가 일했으면 좋겠다 싶은가 봐.”
“취업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적당한 일거리 찾기가 쉽지 않아. ‘워크넷’이라고 취업 알선해주는 플랫폼이 있어. 거기에 프로필 등록해 놓으면 연락이 많이 오는데 내 맘에 드는 자리는 잘 없어. 새벽에 나가서 직원들 출근하기 전에 사무실 청소하는 일 같은 것들이 들어오더라고. 새벽부터 나가서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요리에 관심 많으니까 조그만 식당이라든가 자영업 해 볼 생각은 없고?”
“내가 은행에 근무해 봐서 자영업자들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 그런 위험을 감당하면서까지 자영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결혼한 딸이 얼마 전에 출산했어. 곧 아들도 결혼하면 애가 생길 거고. 그러면 손주들 봐줄 사람이 필요하잖아. 앞으로 집안일과 손주들 돌보는 것을 내 주된 일거리로 삼으려고 해. 내 적성에도 잘 맞을 것 같고.”
“좋은 생각이네. 그런데 집안 식구들이 네가 힘든 일 하는 것을 알아줘야 할 텐데. 살다 보면 식구들이 애를 잘 못 본다고 짜증을 내거나 네가 집안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화가 나지 않을까? 자꾸 화가 나면 정신건강에 안 좋잖아.”
“그것이 제일 문제야. 나는 식구들을 위해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집안 식구들이 은연중에 나를 무시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 그런 상황만 없다면 괜찮은 선택인데. 아내가 2030년 퇴직이니 아직 8년 남았거든. 어차피 그때까지는 누군가가 집안일을 해야 하니까 내가 그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했어. 아내나 애들 모두 좋아하더구먼. 우리 어머니만 싫어하셔. 남자가 집안일 한다고.”
“얘기 들어보니 손주 돌보고 집안일 하는 것이 적성에도 맞고 여러모로 좋을 것 같네. 식구들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중받을 수만 있다면.”
“맞아. 그게 중요한 문제야.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아.”
K와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베이비 부머, 소위 꼰대 세대에게 은퇴 후 “무엇을 할 것인가?” 못지않게 “주변으로부터 존중받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할 것인지는 자신의 취향과 처한 상황을 신중하게 고려해서 선택하면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중받는 일은 상대가 있는 일이라 단순하지 않은 듯하다. 나를 존중할지 말지가 상대방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 노력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여부 역시 상대방에게 달렸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이러면 어떨까. 내가 어쩔 수 없는 상대방 마음에 매달려 일희일비하지 말고 그것은 그냥 놔두고 대신 그 에너지를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좀 더 집중하는 데 쓰면.
예를 들면, 식구들이 더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철 따라 집안 인테리어를 조금씩 바꾼다거나 혹은 돌보는 손주와의 일상을 일기형식으로 꼼꼼하게 기록했다가 나중에 아이가 컸을 때 전해 주는 등으로 집중도를 높여 하고있는 일의 질을 높여나가자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심기를 살피기 위해 쓰던 에너지까지 모아서.
그렇게 일상에서 묵묵히 정성을 다하다 보면 주변으로부터 존중을 받을 수도 있고 설혹 존중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후회는 없지 않을까.
◇ 임송
중앙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펜(Upenn)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정책학을 공부했다. 1989~2008년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공직 생활을 했다. 부이사관으로 퇴직 후 일용직 목수를 거쳐 2010년 지리산(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최근 동네에 농산물 가공회사 '웰빙팜'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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