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사고(史庫)'만도 못한 디지털 백업 참사

'조선왕조실록 사고(史庫)'만도 못한 디지털 백업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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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영인본 연희전문에 기증한 해남의 은퇴 공직자

기사승인 2022-10-17 09:49:35
1930년 6월 9일

전남 해남군 유시 이재량(74) 씨는 경성제국대학이 2년여에 걸쳐 제작해 출간을 앞두고 있는 이조실록 사진판인영본 한질을 연희전문학교에 기증했다.

이 인영본은 이번에 제작한 10질 중 한 질로 이 씨는 거금 육천원을 들여 구입했다. 이로써 연희전문과 조선총독부도서관, 일본 게이오대학도서관 등이 이 인영본을 소장하게 된다.

기증자 이재량은 소년 시절 급제하여 남평 등 수군데의 군수를 역임 후 다년간 종정원경(대한제국황족회장) 등을 역임했다.(중략)

이조실록은(중략)…승하하신 왕의 일대기를 정리 편찬한 후 다섯벌을 인쇄해 춘추관에 한 벌, 강화도 정족산, 영주 태백산, 무주 적상산, 강릉 오대산 등각산성 사고에 각 한 벌씩을 보관하였던 것으로 그 책수가 팔백사십팔책의 방대한 기록이다.

이번 사진판으로 만든 인영본은 영주 태백산 사고에 있던 것을 원본으로 하여 약 14만 페이지 가량이 되리라 한다. (출전 조선일보)
일제강점기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오대산 사고(史庫) 중심 건물 사각

□ 해설

‘이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을 말한다. 일제가 한국사를 폄하하기 위해 ‘조선’이라는 국가 명칭 대신 ‘이씨’ 왕조를 강조하기 위해 이처럼 불렀다. 

당시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이 조선 태종~철종 연간 1893권 888책의 방대한 분량을 영인본으로 제작했고 이 영인본 중 한 질을 태조 이성계 후손 ‘전주 이씨’ 한 분이 거금을 들여 구입해 사립 연희전문에 기증했다는 뉴스다.
1930년 '조선왕조실록' 영인본을 연희전문에 기증했던 관료 이재량

‘조선왕조실록’은 국가의 중요한 기록이기 때문에 분실 및 훼손될 때를 대비해 여러 개를 만들어 전국 곳곳의 사고에 보관했다. 이 실록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조선 전기에는 도성의 춘추관과 경상도 성주, 충청도 충주, 전라도 전주의 사고에 나누어 보관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사고가 불에 타고 유일하게 전주 사고의 실록만 무사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전주 사고의 실록을 바탕으로 다시 4부를 제작해 춘추관과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 마니산(나중에 정족산으로 옮김) 등 깊은 산속에 보관했다.

그럼에도 1624년 이괄의 난 때 또다시 불에 타 사라졌다. 적상산의 실록은 나중에 창덕궁에 있는 장서각으로 옮겼으나 광복 직후 일부를 도난당했다.

6·25 전쟁 때는 북한이 가져가 김일성대학에 보관 중이다. 일본이 가져간 태백산과 정족산본은 광복 후 돌려받았으나, 오대산본은 1923년 일본의 간토 대지진 때 대부분 불에 타 2006년에 나머지만 돌려받았다.

‘카카오 사태’로 국가의 모든 시스템이 엉망이다. 국민 생활에 불편을 넘어 경제에도 막대한 악영향을 주고 있다.

어떻게 수백 년 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조선 조정의 백업 시스템만도 못한지 실소가 날 지경이다. 국가기반 통신망 자체가 무너진 셈이다.

국민은 독점, 독과점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하게 다가오는지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몰아주기식 소비’는 결국 자기 손해로 다가온다.

자본주의 시대 부를 축적한 이들도 이재량과 같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이 없는 한 같이 망하게 된다는 걸 깨닫게 하는 ‘인재 사고’가 아닌가 싶다.

중세시대 ‘성경’을 독점한 이들은 면죄부를 팔 정도로 타락하다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현대에 들어선 정보독점은 타락을 낳는다. ‘카카오 사태’가 그렇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lakajae@kukinews.com
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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