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스물셋, 아빠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 나이 스물셋, 아빠를 돌보기 시작했다

아픈 가족 돌보는 청년, 영케어러
학업 중단·고독감 토로…복지 서비스 접근성 낮아
간병 수당 주고 학비 지원하는 해외 국가들
복지부 실태·현황 파악 아직
전문가 “생애 빈곤 초래…사회 문제”

기사승인 2022-10-24 06:16:01
그래픽=이해영 디자이너.

네 식구가 다 같이 외출하는 날은 이제 오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집에서 아버지를 지켜야 해서다. 돈을 벌어야 하는 어머니와 언니를 대신해 지난 2년간 대학생 김민지(가명·25)씨가 그 역할을 했다.

민지씨 아버지는 지난 2020년 여름부터 루게릭병(ALS·근위축성 측삭경화증) 증상이 나타났다. 이듬해 5월 진단을 받았다. 루게릭병은 운동을 담당하는 신경세포가 점차 죽는 퇴행성 병이다. 환자는 호흡근육이 서서히 마비돼 호흡량이 줄고 기도 내 분비물이 기도를 막거나, 폐렴을 유발해 사망한다. 발병 후 생존기간은 평균 2~5년이다.

의사 진단을 받고 민지씨 가족은 제주도를 갔다왔다. 마지막 가족 여행이었다. 아버지는 이제 스스로 숨을 쉬는 것도, 음식을 삼키는 것도, 말하는 것도 못한다. 딸에게 화장실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던 아버지는 이제 순순히 몸을 맡긴다.

민지씨가 그린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그의 일과. 새벽에도 가족이 수시로 일어나서 가래를 제거하고 거즈를 교체해야 한다.   사진=정진용 기자

새벽에도 울리는 벨…24시간 쉬지 않는 돌봄

활동지원사를 구하기 전 2달은 오롯이 민지씨 혼자 아버지를 돌봤다. 민지씨 하루는 아침 6시 반 가습기 물을 갈면서 시작한다. 500㎖ 비닐팩에 담긴 경관식(관으로 공급하는 액체 상태의 식사)이 아버지의 아침식사다. 흔들고 데워서 준비한다. 식사가 끝나면 소변통을 갖다 댄다. 기도 절개 주변을 소독하고 거즈를 교체한다.

가래 제거는 가장 중요한 간병활동이다. 가래를 묽게 하는 약을 네뷸라이저(의료용 분무기)로 흡입하게 한다. 폐에 바람 넣는 기계를 사용해 기침을 유발한다. 이렇게 하면 가래가 나온다. 콧줄 테이프를 교체하고 물티슈를 한 번 빨아서 얼굴을 닦는다. 아버지를 일으켜 거실 안락의자에 앉혀드린다. 여기까지가 점심 전까지 할 일이다.

가래 제거와 침이 흐르지 않게 입에 물린 거즈 교체는 수시로 해야 한다. 거즈가 젖으면 아버지는 손에 쥔 비상벨을 누른다. 거즈를 바꿔 달라는 뜻이다. 온 가족이 잠든 새벽에도 벨은 울린다. 

서울 한 대학교 강의실.   사진=박효상 기자

“내 시간은 없어요” 우울증도 찾아와

대학원을 준비하던 민지씨 계획은 ‘올스톱’됐다. 민지씨 꿈은 제약사 연구직이다. 최소한 석사 학위가 필요하다. 민지씨 아버지는 지난해 9월 대학 병원에 입원했다. 대학원 원서 접수 기간이었다. 친구들이 자기소개서, 이력서를 교수님에게 보내며 들어갈 랩실(연구실)을 구할 때 민지씨는 간호사에게 가래 제거하는 법을 배웠다. 루게릭병 환우 온라인 카페에서 활동지원사 제도를 알게됐다. 동사무소, 국민건강보험공단 등 행정기관과 통화하느라 바빴다. 동기보다 적어도 1년 반이 뒤쳐졌다.

아버지를 돌보는 그 긴 시간 안에 민지씨 본인을 위한 시간은 없었다. 밖에 나가지 못했다.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를 보냈구나, 자책으로 밤을 새웠다. 정신과 상담은 비용 때문에 엄두도 못 낸다. 활동지원사를 간신히 구했지만 돌봄은 계속된다. 각종 비상 상황 발생시 활동지원사는 가족을 찾을 수밖에 없다. 바깥에 잠시 나와도 온 신경이 핸드폰에 가있다. “자리를 비우거나 전화를 못 받아서 아빠가 돌아가시면 어떡하지”라는 생각 때문이다. 

“공백 기간에 무얼 했나요” 면접관이 물어볼까봐 민지씨는 두렵다. ‘집에서 아빠를 돌봤습니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불이익으로 돌아올 것만 같다. 민지씨 언니 역시 회사 상사에게도, 진지하게 만나는 남자친구에게도 아직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힘들다고 털어놓기 쉽지 않다. 

보건복지부.   사진=박효상 기자

영케어러 30만명 추정…실태조사 부실

민지씨는 ‘영케어러(Young Carer)’다. 영케어러에 대한 정확한 법적 정의나 규정은 아직 없다. 해외에서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 장애나 질병을 가진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 또는 청년으로 정의한다.

이른바 대구 ‘간병살인’ 사건 이후 해를 넘겼지만 정부는 영케어러에 대한 정확한 현황·실태 파악조차 못했다. 지난해 2월 20대 청년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홀로 1년 가까이 돌보다 아버지를 방치에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이 청년은 아버지가 쓰러지자 가스와 전기가 끊기는 등 극심한 경제난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4월에서야 영케어러 설문조사를 했지만 학교밖 청소년은 실태조사 대상에서 빠졌다. 설문에 응한 사람들에 대한 조사만 이뤄져 부실 비판이 나왔다. 복지부가 이번 실태조사로 파악한 영케어러는 1802명이다. 청소년 인구 5~8%가 영케어러라는 해외 연구를 근거로 국회입법조사처가 내놓은 추정치는 18만4000명~29만 5000명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11월 중 실태조사를 분석해 ‘가족돌봄청년 관계부처 TF’를 열 계획”이라면서 “TF에서 지원대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설문조사 한계를 감안해 내년 추가 조사를 실시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복지 서비스 접근성 높인 해외…학비 보조도

영국, 호주, 아일랜드는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어 영케어러에 다양한 지원 및 서비스를 안내한다. 영케어러 고립을 방지하기 위해 소통과 연대 창구를 마련했다. 수당과 보조금 지원도 이뤄진다. 영국에서는 주당 최소 35시간의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만 16세 이상 청년에게 간병인 수당을 지급한다. 호주에서는 12~25세 영케어러를 위한 학비 보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돌봄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청소년을 지원해 학업 중단을 막기 위해서다. 1인당 약 257만원을 지급한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가장 큰 문제는 활용할 수 있는 복지서비스가 있다해도 영케어러와 연결이 안 된다는 점”이라며 “영케어러는 조력자 없이 혼자 복지 서비스를 알아보고 필요한 서류를 구비해 신청해야 한다. 쉽지 않다”고 말했다.

허 입법조사관은 “청년이 가족 돌봄 책임을 지는 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면서 “자립을 준비 할 시간에 간병에 전념하느라 미래를 준비할 기회가 제한되고 박탈된다. 돌봄으로 인한 학업 중단은 영 케어러와 그 가족의 생애빈곤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를 방관한다면 미래 사회가 감당해야 할 비용과 수고가 클 것”라고 지적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정진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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