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진척이 없던 한일관계 개선의 운을 뗐다는 데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사과와 반성’이 없는 상태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과연 국민적인 공감을 받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이 연상되는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최근 급박하게 돌아가는 한일관계 개선 의지와 전후 사정에 대해 오랫동안 한일관계와 역사인식 문제를 연구해온 역사학자 이신철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장(성균관대 겸임교수)과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 사무실에서 만나 대담을 나눴다.
다음은 이 소장과의 일문일답.
-3·1절 기념식을 전후해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있다. 정부는 강제동원 배상 해법안 등을 내놓으면서 한일 정상회담까지 성사시켰다. 최근 일련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보는지
▶여러 차례 반복된다는 점에서 결코 돌발적인 결단은 아닌 듯하다. 윤석열 정권이 구상해온 하나의 정책이라고 봐야 한다. 다만 시기나 내용 모두 부적절해 국민적인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대통령의 소신에 따라 외교 정책을 펼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자기 소신대로만 해서도 안 되는 것이 외교다. 당연히 국익과 더불어 국민의 여론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한일관계에서는 역사적인 부분까지 따져야 한다. 이번 윤석열 정부의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결단은 너무 일방적이고 정파적이라고 본다.
-한일관계 개선 필요하다는 여론은 높다. 그런데 무조건 잘못됐다고 할 수 있나
▶한일관계 개선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나온 한일관계 개선의 필요성 찬성률인 60% 수준도 오히려 현실보다는 낮은 수치일 듯하다. 역사적인 원한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미래를 같이 개척해 나가야 하는 이웃 국가이기에 당연히 풀어야 한다. 결코 관계 개선을 반대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런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그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정당성을 가진다든지 이득을 취한다든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과거의 식민지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 전제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성 없이는 불가하다. 그런데 일본의 과거 침략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논리를 대통령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
-일본이 이미 사과와 반성을 하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는데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동원을 한 적이 없다고 하고, 강제 동원조차도 당시 불가피한 상황에서 법을 통해서 했다고 주장하는데 어떻게 사과와 반성이 있었다고 할 수 있나. 아베 정권을 계승한다는 기시다 정권은 일본 역사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면서 ‘종군’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했고, 강제동원 문제에서 ‘강제 연행’, ‘강제 동원’이라는 말도 쓰지 말라고 하고 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교육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과연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사죄했다고 할 수 있겠나. 이런 가운데 ‘식민지 근대화론’과 궤를 같이하는 제국주의 논리를 옹호하고, 국내 기업의 출연을 강제하는 ‘제3자변제’ 방식의 강제동원 배상 해법을 우리가 내놓은 것은 엄청난 굴욕이다.
-굴욕 외교라는 표현을 썼는데 또 다른 근거가 있나
▶일본 정부가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려던 것을 일본 아베 정권이 막아섰던 것도 일본의 사과와 반성이 없다는 증거다. 아베 정권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기시다 정권이 아무런 태도 변화가 없는데 먼저 한일관계를 풀자고 하는 게 당연히 굴욕적인 게 아닌가. 그런 점에도 독일과도 비교된다. 독일 정부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전범·가해 기업들이 피해자들로부터 얻었던 이익을 돌려줘야 한다면서 기업차원의 배상을 독려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법적 사과는 없었다는 한계점은 존재하지만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명확히 사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태도와 대조된다.
-윤 대통령이 삼일절 기념사에서 언급한 발언 일부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어떻게 보는지
▶상당히 부적절하다 그런 경향을 강하게 느꼈다. 역사학자가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는 것과 한 국가의 수장이 자기 나라 역사의 성격을 정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일제 식민 역사를 두고 학계서는 얼마든지 얘기하고, 토론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담화는 정치 외교의 영역인 만큼 마음대로 단정 지어선 안 된다. 국민이 선출한 권력이지만, 대통령에게 한 민족과 나라의 역사를 정의 내릴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된 것은 아니다. 일제 식민지 덕분에 근대화가 이뤄졌다는 게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요 논리인데 다양한 반론이 있고, 학교 교육에서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인과 조선인에게 차별이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일 아닌가. 역사적 평가는 학문의 영역이지 결코 정치나 외교의 영역은 아니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에서 조선의 식민화가 우리 탓이고,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식민지 근대화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고 대단히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윤 대통령의 기념사 발언이 시기상의 문제도 있다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가
▶한일관계 개선이 시급하다고 판단해 나온 기념사일 수 있지만 3·1절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었다. 윤 대통령은 개항기에 우리가 제대로 된 국력을 갖추지 못해 일본에 식민 지배를 당한 것이라고 평가했는데 3·1절은 그런 힘이 없었음에도 저항하고 평화를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들을 기리고 기념하는 날이다. 그런 날 제국주의 논리를 들이댄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힘의 논리가 당연시된다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문제 삼으면 안 된다. 힘 있는 러시아가 힘 약한 우크라이나를 지배하고 나토(NATO)라는 더 큰 적을 막아보겠다는 것인데 제국주의 논리를 인정한 우리가 무슨 비판을 할 수 있겠나
-국익을 위해서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지 않겠나
▶국익 우선 주장을 펼치는데 어떤 게 과연 국익인지 되묻고 싶다. 현재 정부가 내세우는 국익은 크게 한일관계 개선을 통한 경제적 이익과 한미일 안보 체제의 공고화다. 하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실익은 크지 않을 수 있다. 과거 일본과의 무역 분쟁을 겪었지만, 그 이후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몰락했다거나 일본에 비해 경제 상황이 뒤졌다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국내 중소기업들이 재발견됐으며, 일본이 손해를 봤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또 지금의 무역 분쟁 사태가 해결된다고 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 또한 역사적 명분 등을 포기할 정도로 클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수치상 비교만 해도 얻을 이익보다 잃을 이익이 크다. 한국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한 사람이 23만 명 정도 된다. 물론 정부가 그럴 생각도 없겠지만, 이들에게 대법원 승소자들과 마찬가지로 1억씩 지급한다고 하면, 최소 23조원이 필요하다. 가해 기업의 기금 참여도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기업들이 얼마나 기여할 수 있겠는가? 일본 정부나 기업에게 책임을 묻는 구상권마저 포기한다면, 도대체 어떤 경제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안보 차원에서라도 얻을 수 있는 실익이 꽤 있지 않겠나
▶한미일 협력 체제 공고화를 통해 북한과 중국이라는 위협에 공동 대응한다는 안보 차원의 논리가 있지만 이것은 1970년대에 나 어울리는 논리다. 대결 국면이 아닌 대화 국면으로 갔을 때 얻을 수 있는 국익까지도 면밀히 따져야 한다. 예를 들면, 남북 대화가 활성화됐을 때 개성공단을 통해서 얻은 경제적 이익 또는 안보 리스크 감소에 따른 비용 절감 효과라든지 등의 이득 관계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대통령이 마치 힘에 의한 굴복만이 옳은 길이라고 선언하는 듯한 방식은 결코 국민적인 공감을 얻기 어렵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국익보다는 미국과 일본의 국익을 먼저 생각한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
[다음 편에 후속 인터뷰 계속]
황인성 기자 his1104@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