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대학에서 반도체를 전공하고 있는 4학년 안모(22·남)씨는 이번에 휴학계를 냈다. 의학대학 진학을 준비하기 위해 최근 반수학원에 등록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기업 취직을 준비하던 안씨는 “의사인 아버지 권유에 못 이겨 의대 진학을 위해 휴학을 했다. 킬러문항도 배제된다면 꽤 해볼 만 할 것 같다. 이번엔 안 되더라도 증원이 예상되는 2025학년도엔 확률이 높다고 본다”고 말했다.
휴학이나 자퇴를 하고 의대 진학을 준비하는 이공계 재학생들이 늘고 있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계획과 더불어 킬러문항 배제 방침이 이를 더욱 부추기는 모양새다.
사교육계의 의대 입시반은 활황을 맞고 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14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재수나 반수 뿐 아니라 3수, 4수 등 장수생이 늘어났다”면서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재학생을 비롯해 반도체학과, 대기업 연계 계약학과 학생들도 의대 입시를 준비하러 온다”고 밝혔다.
이어 “킬러문항이 배제되면서 반수생들의 부담이 줄어든 데다 의대 증원으로 기회를 잡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생긴 것 같다”며 “의대 증원 규모로 1000명도 언급이 되는데, 현재 정원의 30% 정도라 장기전으로 보고 의대 입시에 뛰어드는 장수생이 많아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바뀐 정부 방침에 대학가가 들썩이는 분위기다. 대학생 익명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는 의대 반수를 고민하는 글이 다수 올라오고 있다. 안씨는 “킬러문항 때문에 반수가 부담돼 주저하다가 수능이 쉬워진다는 소식에 최근 의대 반수를 고민하는 친구들이 늘었다”며 “4학년 중엔 저처럼 취업할까, 반수할까 고민하는 학생들도 꽤 있다”고 전했다.
심지어 명문대에 진학하자마자, 휴학을 하는 신입생도 있다. 서울대가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서울대 신입생 3606명 중 225명이 1학기에 휴학했다. 신입생의 6.2%가 강의도 듣지 않고 이탈한 셈이다. 지난 2019년 70명에서 올해 225명으로 3배가량 증가한 수준이다. 임 대표는 “이들이 그저 중도 탈락을 하진 않았을 것”이라면서 “의학계열 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방침이 의대로 우수한 인재가 몰리는 ‘의대 블랙홀’ 현상을 가속화하는 부작용을 낳을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김이연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의사 수를 늘리면 의대 쏠림 현상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이어 “자연계열의 상위권 학생들이 의대로 몰리는 것 자체가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도 큰 손실”이라며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사회가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의대 블랙홀’ 문제의 해결책을 ‘의대 정원 확대’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 교수는 “의대 쏠림 현상이 생긴 건 의사가 다른 직업에 비해 훨씬 더 우월한 지위를 얻고, 임금 수준도 높고, 안정적인 데다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직업이기 때문”이라며 “의사 수가 적어 몸값이 상승하는 것 아니겠나. 의대를 가든 경제학과를 가든 별 차이가 없게 되면 초등학교 입시반도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의사 수를 늘려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의사의 독점적 지위를 깨야 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임금 수준을 봤을 때, 의사와 노동자 평균 임금 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이 1위다. OECD 회원국 전문의들의 평균 임금은 노동자 평균 임금의 2.5배 수준인데, 한국은 4.4배다. 개원의로 비교하면 무려 7.6배에 달한다.
김 교수는 “의대 정원을 500명 늘려선 해결이 어렵다”면서 “2000명은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은빈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