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장기요양보험의 혜택을 받으려면 최종 관문 격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장기요양등급판정위원회 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이 위원회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장기요양 급여비용으로만 한 해 10조원이 넘게 지출되고 있지만, 시간에 쫓기는 검토 등에 의해 판정이 졸속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등급판정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A위원은 8일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등급판정위원회 심의 회의 개최 전에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전자기기로 미리 심의자료를 받는다. 자료에 이상이 없으면 동의하라고 독려한다”며 “하루 평균 200~240명을 심사하는데, 심사 대상자 1명당 1분만 봐도 최소 6시간이 소요돼 다들 ‘동의하기’ 버튼을 누르느라 바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등급판정위원회 회의 시간도 보통 1시간 정도에 불과해 심사 대상자를 꼼꼼히 검토하기가 어렵다”면서 “이런 식이면 제대로 된 심사가 이뤄질 수 없다”고 꼬집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은 65세 이상 노인 또는 65세 미만 중 치매나 파킨슨병 등 노인성 질병으로 6개월 이상 혼자 생활하기 어려운 사람이 대상이 된다. 제도는 목욕과 간호 등 요양서비스 비용을 지원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의 혜택을 받기 위해 신청서를 접수하면 간호사, 사회복지사, 물리치료사 등으로 구성된 건보공단 조사원들이 직접 방문해 장기요양인정조사표를 토대로 조사를 진행하고, 총 52개 항목의 결과를 바탕으로 ‘장기요양인정점수’를 매기게 된다.
장기요양인정점수는 심신의 기능 상태에 따라 ‘일상생활에서 도움(장기요양)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지표화한 것으로, 5개 등급으로 나눈다. 1등급은 장기요양인정점수가 95점 이상, 2등급은 75점 이상 95점 미만, 3등급은 55점 이상 75점 미만, 4등급은 51점 이상 60점 미만, 5등급은 치매환자로 45점 이상 51점 미만이다.
이렇게 나온 장기요양인정점수는 의사와 한의사 등 의료인, 사회복지사, 공무원 등이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급판정위원회의 심의를 받는다. 위원회는 방문조사 결과, 의사소견서, 특기사항을 살피고 신청인의 기능 상태와 장기요양이 필요한 정도 등을 등급판정 기준에 따라 최종 판정한다.
하지만 위원회 심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의료인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구조라는 점, 그리고 그러한 구조 속에서 수많은 판정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A위원은 “산업재해 인정이나 장애등급 판정은 심사가 까다로운데 반해 노인장기요양보험등급 판정은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제대로 된 등급 판정을 내리려면 자료를 세심하게 봐야 하는데 신청인은 많고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그냥 넘기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놨다.
이어 “건보공단 조사원들의 조사표와 의사소견서 간 내용이 맞지 않아 심사를 할 수 없다고 전하니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조사관을 믿어라’라는 말이 돌아왔다”며 “날림으로 소견서를 쓰는 의사들도 더러 있다”고 했다.
노인 인구가 늘면서 장기요양 급여비용과 수급자 수는 증가하고 있는데 개선 없이 이대로 심사가 이어지면 건강보험재정 수준이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타냈다.
실제 건보공단이 발표한 ‘2022 노인장기요양보험 통계연보’를 보면, 지난해 노인장기요양보험 신청자 수는 134만8961명, 인정자 수는 101만9130명으로 조사됐다. 2021년 대비 6.9% 늘어난 것이자 사상 처음으로 100만명대를 기록했다. 지난해 노인장기요양보험에 들어간 급여비는 2021년보다 13% 증가한 12조5742억원으로 나타났다.
A위원은 “일차적으로 조사원들이 장기요양인정점수를 작성해 등급위원회에 제출하면 등급이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조사관한테 문제를 제기해도 듣지 않는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국가에서 한 해 10조원이 넘는 세금이 지출되는 건데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개선이 꼭 필요한 제도다”라고 피력했다.
건보공단은 공정한 등급판정위원회 심의를 위해 의료인 의견을 반영하고 있다며 이른바 ‘날림 소견서’ 제출을 방지하기 위해 올바른 작성법 교육과 홍보를 강화하고 있단 입장이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건보공단은 공정한 등급판정위원회가 되도록 회의 시 의사와 한의사 등 의료인의 참여를 의무화하고 있다”며 “의사소견서 작성 지원을 위해 대한의사협회와 대한한의사협회 등 관련 협회의 의견을 반영한 작성지침을 마련했다”고 전했다.
등급판정위원회의 짧은 회의 시간으로 자료 검토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선 “심도 있는 등급판정 심의와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전체 등급판정위원에게 심의 회의 개최 3일 전 심의자료 전건을 제공해 사전 검토 후 등급판정위원회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