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타인 소유의 사유지나 건물을 임대한 임차인에게 요양시설 설치·운용을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하자 보건·복지 분야 19개 학회가 반대하고 나섰다. 노인요양시설에 거주하는 노인들의 주거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복지학회, 한국노인복지학회 등 19개 학회(이하 학회들)는 21일 공동 성명서를 내고 “노인의 주거권을 침해하고 장기요양제도의 공공성을 훼손하는 노인요양시설의 임차 허용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현행 노인복지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10명 이상이 이용하는 노인요양시설을 설치하려면 토지나 건물을 사업자가 소유해야 한다. 아니면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공공임차를 해야 가능하다. 입소 노인의 안정과 무분별한 시설 난립을 막기 위한 일종의 규제 장치인 셈인데, 보건복지부는 임차인도 요양시설 설치·운용이 가능하도록 시행규칙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 규제를 풀어 시설 공급을 확대할 계획이다.
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지난 7월19일 수도권 등 일부 지역에 제한적으로 임차를 허용하는 내용의 정책 연구 중간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이어 이달 17일 복지부는 ‘제3차 장기요양기본계획’을 발표하며 노인요양시설 확대 방안으로 노인요양시설 임차 허용을 예시로 들면서 제도 개선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에 학회들은 “노인요양시설의 임차 허용은 노인요양시설에 거주하는 노인들의 주거권을 침해할 수 있다”며 “시설의 재정상태가 악화되거나 시설의 모기업이 갑자기 파산해 노인요양시설을 폐업할 경우 거주하던 노인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인요양시설의 임차 허용은 손해보업업계의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적은 자본금으로 노인요양시설을 설립할 수 있게 되면서 장기요양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투기성 자본의 유입이 심화될 수 있다”며 “시설 난립 등의 문제를 더 키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존 시설 설립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제기했다. 현재 노인요양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공급자들은 대개 법인과 개인의 자산을 투입하거나 은행에서 대출 등을 받아 어렵게 시설을 설립했는데, 노인요양시설의 임차를 허용하면 신규로 시장에 진입하는 시설들은 훨씬 적은 자본금으로 시설을 설치할 수 있게 되고 이는 기존 시장을 잠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노인요양은 시설보다는 재가 서비스 중심으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한 정책 방향이라고 짚었다. 학회들은 “노인요양시설의 임차 허용은 시설 요양의 과대 공급을 유인하고 서비스 품질을 저하시켜 요양서비스 발전에 역행할 것”이라며 “정부는 노인요양시설의 임차 허용 정책 추진을 즉각 중단하고, 종합적인 장기요양 공공성 증진안을 강구해야한다”고 피력했다.
요양시설들도 분명한 반대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권태엽 한국노인복지중앙회 회장은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지자체마다 공립 노인요양시설을 늘리는 마당에 임차를 허용해 민간을 끌어들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라며 “서울 강남구, 서초구 등 땅값이 비싸서 요양시설이 못 들어가는 일부 지역을 고려해 임차를 허용하겠다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권 회장은 “시설 종사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은 안 해주면서 무작정 시설 수만 늘리는 건 황폐화된 고사 직전의 기존 노인요양시설을 낭떠러지에 밀어 떨어트리는 일이다”라며 “정부가 현장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