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 앞둔 고준위법, “정치논리에 매몰…정보공개가 우선”

폐기 앞둔 고준위법, “정치논리에 매몰…정보공개가 우선”

20대 국회부터 나온 고준위법, 사실상 폐기 수순
정재학 “후손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방식”
이정윤 “법 전에 민주적 합의 먼저 찾아야”

기사승인 2023-12-04 06:00:02
원전 내 사용후핵연료 습식저장소(수조). 사용후핵연료가 저장용량의 90.2%까지 채워져 포화가 임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수력원자력

쓰레기통이 가득 찼다. 이미 쌓인 쓰레기와 앞으로 쌓일 쓰레기를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재 원자력계는 2030년에 포화 직전인 국내 원전에서 만들어지는 사용후핵연료를 처리할 방법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지난해 11월부터 이야기가 나왔던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특별법(고준위법)이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영구처분을 위한 △부지선정 절차 및 일정 △유치지역 지원 △독립적 행정위원회 설치 △원자력발전소 부지 내 건식저장시설 설치 등을 골자로 한다.

그러나 2일 업계에 따르면 고준위법은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 여야 모두 관련 법안을 발의했음에도 일부 쟁점을 두고 입장이 좁혀지지 않아 흐지부지된 것이다. 이에 학계에서도 고준위법을 두고 반응이 엇갈린 것으로 나타났다. 

정재학 경희대학교 원자력공학과 교수.

후행핵연료주기(원자력발전소에서 연소된 후 인출한 사용후핵연료를 처분하는 모든 관리 과정)를 연구하는 정재학 경희대학교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고준위법이 발의 및 공론화가 된 지는 오래다. 그러나 긴 시간을 거쳤음에도 법안이 실질적으로 수정된 부분은 거의 없다”고 토로했다.

이어 “특히나 올해는 좋은 분위기에서 계속 법안이 진행됐기에 (통과되기를 기대했는데) 고준위법이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은 것이 개인적으로는 아주 아쉽다”고 입을 열었다. 두 번이나 진전없는 상태에서 어그러진 법안이 다음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설명이다.

여야가 끝까지 이견을 좁히지 못했던 쟁점 중 하나는 부지 내 저장시설 용량에 대한 문제다. 여당은 부지 내 저장시설 용량을 ‘원자로 운영 허가 기간의 발생 예측량’으로 제한했다. 향후 원전이 수명연장 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다. 반면 야당은 '설계 수명 기간의 발생 예측량'으로 제한했다. 원전의 최초 운영 허가 때 심사했던 설계 수명이 종료되면 저장시설 용량도 늘릴 수 없다는 뜻으로, 원전을 더 늘리지 말자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정 교수는 “특정 정당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고 싶지는 않다”면서도 “그러나 원전 자체를 확대하거나 유지, 혹은 감소하자는 논쟁은 이 고준위법에서 논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냈다. 이어 “불가피하게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용후 핵연료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말해야 하는데, 해당 법안에 원전 확장 반대라는 새로운 아젠다를 가져와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특별법의 취지에 맞지 않은 새 논쟁이 끼어들어 논점을 흐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 상황을 두고 ‘무책임하다’고 평가한다. 정 교수는 “한국은 1978년에 원전 사업을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도 사용후핵연료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라면서 “전 세계적으로 이런 사례는 없다. 여야를 떠나서 우리가 지난 45년간 원전에 의존해 전기를 생산해 왔는데, 그 이후의 문제를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이정윤 원자력안전과미래 대표.

반면 ‘선 제정 후 통보’식의 고준위법 제정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정윤 원자력안전과미래 대표는 좀 더 많은 정보를 공개하고, 객관적인 데이터로 시민들을 설득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대표는 “여야 모두 해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에는 뜻을 모았다. 그러나 한쪽은 폐기물을 좀 줄이면서 해결하자는 입장이고, 한쪽은 폐기물이 계속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방향을 선택했으니 문제”라면서 “민주적인 합의나 충분한 설명 없이 법으로 (사용후핵연료저장 문제를)강제하면 안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법부터 나오면 제정 이후에는 국가가 어느정도로는 강제적으로 일을 집행할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이어 “주민들과 사전에 충분한 논의 과정이 필요하다. 아직 우리는 이 법을 통과시킬 만한 제반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 국회에서 해당 법이 통과되려면 투명한 정보 공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대표는 “발전소 주변만 보더라도 방사선 피해자가 나오는데, 일부 전문가들은 법적 기준치 이하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원론적인 주장을 한다”며 “그러나 의학적 연구 결과로는 작은 피폭에도 고형암 발병이 가능하다고 나와 있을 정도로 피폭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이렇게 시민들이 불안해하는 것들을 데이터로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시민들이 그 증명을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심하연 기자 sim@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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