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국내총생산(GDP) 세계 14위인 경제 대국이자 K-콘텐츠의 글로벌 영향력을 자랑하는 국가로 올라섰다. 지난 20년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부문도 있다. 바로 자살률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살예방 정책과 예산을 꾸준히 늘려왔다. 그러나 자살률은 꺾이지 않아 일각에서는 예산이 헛스윙하고 있는 지적이 나온다.
17일 쿠키뉴스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받은 전국 17개 시도에 최근 5년간 자살예방예산 내역을 분석한 결과, 올해 총 자살예방예산은 549억원이다. 2020년 236억원에서 연평균 12%씩 증가하는 추세다. 17개 시도 연평균 자살예방예산은 모두 늘었다.
17개 시도 중 올해 자살예방예산이 가장 많은 지자체는 충청북도로, 120억원에 달한다. 이어 서울 69억원, 충남 64억원, 경기도 63억원, 강원 43억원 등 순이다. 가장 적은 지자체는 전라북도로 1억8000만원이다.
자살은 끊이지 않는다. 서울 강북구 보건소 소속 50대 직원이 지난 1일 사망한 일이 13일 뒤늦게 알려졌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지난 8일에도 충북 청주에서 지적장애를 가진 일가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직장 내 괴롭힘’ ‘신변 비관’ 등 이유는 조금씩 다르지만,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이 별다른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삶을 스스로 마감한 것이다.
자살예방예산도, 자살자 수도 늘었다
통계청의 최근 5년간 고의적 자해(자살)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자살자 수는 1만3195명으로, 연평균 1.2% 늘어 지난해 1만3661명에 달했다. 최근 5년간 연평균으로 자살자 수가 감소한 곳은 전국 17개 시도 중 서울(-0.2%) 전라남도(-1.3%) 제주도(-1.9%) 대전(-2.3%) 전라북도(-3.4%) 등 5곳에 불과하다. 최근 5년간 연평균 자살예방예산은 모두 늘어났는데, 전국 12곳은 연평균 자살자 수가 늘어난 셈이다.
작년 자살자 수만 살펴보면, 1년 전(1만2906명)보다 5.8% 증가했다. 지난해 기준 전년 대비 자살자 비율이 줄어든 곳은 17개 시도 중 대전(-0.3%) 세종(20.5%) 전북(-2.4%) 등 3곳에 불과하다.
자살예방예산은 평균적으로 늘고 있는데, 자살률 감소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17개 시도 중 자살예방예산이 가장 많은 충북(2월 기준 인구 159만명)의 경우 지난해 자살자 수(511명)가 1년 전(461명)보다 10.8% 늘었다. 올해 예산 꼴찌인 전북(인구 175만명)은 지난해 자살자 수(451명)로, 전년(462명) 대비 2.4% 줄었다.
예산 적은데, 그마저 헛도는 자살예방 시스템
자살예방예산은 해외와 비교해 적은 수준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 1월 발간한 ‘2024년도 예산안 심의결과’에 따르면 정부의 자살예방 관련 사업으로 확정된 예산은 총 603억원가량이다.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안실련)이 2021년 일본의 자살예방 관련 예산으로 추산한 8300억원의 7.3% 수준이다.
17개 시도 중 자살예방예산 1위인 충북의 올해 전체 예산은 16조7208억원이다. 자살예방예산은 전체 예산의 0.07% 수준에 불과하다. 최근 보건소 소속 직원이 숨진 서울도 전체 예산(45조7405억원) 중 자살예방예산은 0.02% 수준이다.
문제는 예산이 인건비에 대부분 쓰여 실제 자살 위험군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A지자체 관계자는 “예산 대부분이 인건비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임삼진 생명존중시민회의 상임위원은 “자살예방예산이 많지 않아 지역 상담사들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일부 지역은 교통비 일부만 지원된다. 자원봉사에 의지하는 상황”이라며 “이와 비교해 상담 건수는 과도하게 많다. 지역 상담 체계가 원활하게 작동될 수 있도록 해당 예산을 많이 편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예산 확대·현실적인 정책 필요
전문가들은 자살예방예산을 확대하고, 자살 위험군에게 실질적인 지원이 닿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 대전의 경우 지난 2021년 425명이었던 자살자 수가 2022년 371명으로 내려왔다. 같은 기간 자살예방예산은 13억원에서 21억원으로 대폭 늘렸다.
임 상임위원은 “일본의 경우 지역마다 나름의 상담 체계를 갖추고 민간간체나 상담 시스템과의 연결을 통해 자살률을 실질적으로 줄일 수 있도록 초기부터 지원이 돼 왔다”며 “한국은 자살유가족 관련 예산은 공식화된 것이 없다. 지자체에 지역 내 자살 예방 상담 체계를 구축하는데 예산이 편성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양두석 안실련 자살예방센터장은 “지역은 자살예방센터 채용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 간호사 상담심리사 간호조무사 등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이런 자격을 갖춘 이들을 지역에서 찾기 어렵다. 예산은 많은데 채용하지 못해 예산이 남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단체장이 기관장으로서 자살 예방을 위해 앞장서는 역할을 해야 한다. 경기도 광명의 경우 시장이 직접 진두지휘해 각 관계 기관 및 전문가를 초청해 회의하고 신규 건물을 인허가 할 때 옥상에 사람이 뛰어내리지 못하게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게 지시하는 등의 역할로 자살률을 줄였다. 이같은 단체장의 의지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정신건강정책 비전선포대회’를 개최하고 정신건강 정책 혁신 방안을 발표하면서 10년 안에 자살률을 OECD 평균 수준으로 끌어내린다는 구상을 밝혔다. 우리나라의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은 25.2명이다. OECD 평균 자살률은 10.6명 수준이다.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