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실’을 두지 말고, ‘강사 휴게실’을 둬라. 그래야 법원에서 말하는 고용, 지시 관계에서 벗어난다.”
“숙제를 내주지 마라. 숙제는 내주면 강의 수반 필수 업무 시간이 늘어난다. 그럼 초단시간 근로자가 아니게 되어 일이 복잡해진다. 숙제 등은 자율로 돌려라.”
국립국어원이 주최한 강연에서 한국어교원의 실제 노동시간과 관계없이 주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계약을 맺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꼼수가 소개된 것으로 확인됐다.
17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립국어원으로부터 제출받은 관련 자료에 따르면, 지난 7월 국립국어원이 주최한 ‘국내 대학 한국어교원 대상 배움이음터’ 행사에서 A대학교수는 대학 관리자급 전문교원을 대상으로 대면·비대면 강의를 진행했다.
문제는 비대면 강의에서 주 15시간미만 근로하는 한국어교원의 계약갱신·무기직화 요구를 교묘히 회피하는 편법인 이른바 ‘고용 쪼개기’가 소개된 점이다. 당초 ‘변화하는 교수 환경과 대처 방안’이라는 주제로 강연하기로 한 A교수는 본래 강의 주제에서 벗어나 ‘대학 한국어교원을 초단시간 근로자로 사용하는 방법’ 등에 대해 소개한 것으로 파악됐다.
A교수는 “시험을 간소화하고 채점은 교실에서 수업 시간 중에 하도록 해라. 그래야 교실(근로 장소) 밖 근로가 없어진다”, “‘강사실’을 두지 말고, ‘강사 휴게실’을 둬라. 그래야 법원에서 말하는 고용, 지시 관계에서 벗어난다”, “숙제를 내주지 마라. 숙제는 내주면 강의 수반 필수 업무 시간이 늘어난다. 그럼 초단시간 근로자가 아니게 되어 일이 복잡해진다. 숙제 등은 자율로 돌려라”, “회의 참석을 요구하지 말고 회의 참석 명단도 작성하지 마라. 회의도 강의 외 근로 시간으로 잡히니 회의와 행사는 가급적 말로 전달하고 참석은 자율이라고 안내해라” 등 한국어교원을 가짜 프리랜서(개인사업자), 초단시간 근로자로 몰기 위한 방법을 제안했다.
대다수 한국어교원은 만성적인 저임금과 초단기근로 등 열악한 고용환경에 놓여있다. 이들은 고등교육법을 적용받는 교원이나 강사가 아니라 근로기준법을 적용받는 ‘근로자’에 속한다. 대학 강의노동의 실정에 맞춘 고용안정과 처우개선, 교원 지위 인정 고등교육법상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이같은 이유로 현실에선 한국어교원의 강의 준비 시간은 인정하지 않고, 강의시수만 근무시간으로 치는 초단시간 계약이 만연한 실정이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 온라인노조 추진위원회와 한국어교원협회가 지난 9일 발표한 설문조사(8월26일~9월13일 진행, 524명 참여) 결과에 따르면, 한국어교원 70%가량은 비정규직(계약직, 간접고용)이었고, 이중 계약직 노동자 약 60%는 3개월 미만 초단기 계약을 맺고 있었다. 현행법상 주당 근로 시간이 15시간 미만인 초단기 근로자는 단기간 근로자와 달리 산재 보험을 제외한 4대 보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또 연차, 주휴, 퇴직금 등도 보장받지 못해 법의 사각지대로 불린다.
최근 국내 거주 외국인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003년 1만2000명 수준이던 국내 유학생(어학연수생 포함) 수는 지난해 16만6892명에 이른다. 한류와 외국인 고용 증가로 한국어 교육 수요도 덩달아 늘었다. 한국어교육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어교원들의 처우 개선 대신 편법이 장려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연을 주최한 국립국어원도 관리·감독 소홀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전망이다. 모니터링을 통한 후속 조치 여부가 논란 해소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임오경 의원은 “외국인의 한국어 교육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한국어교원의 역할은 증대되고 있으나 여전히 고용불안과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고 있다”며 “한국어교원의 처우개선과 역량강화에 힘써야 할 국립국어원이 오히려 이들의 권익을 침해하고 반노동적인 내용의 교육을 실시했다는 것은 국가기관으로서 매우 부적절한 행위”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