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분리 신청=바늘구멍 통과하기’…특례 조항 있어도 유명무실 [이상한 나라의 세대분리법④]

‘세대분리 신청=바늘구멍 통과하기’…특례 조항 있어도 유명무실 [이상한 나라의 세대분리법④]

30세 미만 세대분리 신청하려면 가족관계 단절 증명해야
담당 공무원 재량 따라 ‘단절’ 해석 달라지기도
입증서류 기준 없어…현장서도 오락가락 행정

기사승인 2024-11-07 06:05:06
20대 청년이 세대분리 신청을 위해 필요한 서류들. 사회보장급여 신청(변경)서, 소득·재산 신고서, 금융정보 등(금융·신용·보험정보) 제공 동의서, 가족관계 해체 및 부양 거부·기피 사유서, 가정폭력 쉼터 상담 기록, 청소년 쉼터 상담 기록, 통장거래내역 사본, 실거주 확인서 등을 제출해도 세대분리 신청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박효상 기자

# “제출 가능한 서류 다 가져오세요”라는 말에 가정폭력을 버티다 집을 나온 권미희(가명·23·여)씨는 서류만 수십 장 준비했다. 하지만 신청한 세대분리는 통과하지 못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세대분리를 위한 나이, 소득 요건에 맞지 않아 가족관계가 단절됐다는 것까지 서류로 증명해야 했다. 그런데도 독립가구로 인정받지 못했다. 거절 사유도 알 수 없었다. 총 4번의 신청이 모두 거절당하는 동안, 어떤 서류가 더 필요한지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권씨가 ‘가족관계 단절’을 인정받은 건 서대문구에서 동작구로 이사한 이후의 일이다. 같은 서류였다. 달라진 건 관할구청뿐이었다. 서류가 통과한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을 가르는 명확한 기준이라도 있었다면, 이 과정이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권씨는 “구청별로 요구하는 서류와 인정되는 서류가 다른 게 말이 되나”라며 “저처럼 세대분리로 애를 먹는 친구가 한둘이 아니다”라고 짚었다.

위기 상황에 놓인 20대 청년들을 위해 만든 세대분리 특별 조항이 행정 현장에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20대 청년들에게 적용되는 세대분리 서류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담당 공무원의 판단에 따라 인정 여부가 달라지는 등 제도 절차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다.

30세 미만의 미혼·미취업 청년들이 세대분리를 위해 필요한 조건인 ‘가족관계 단절’을 서류만으로 증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20세가 되던 해 수급 신청을 위해 구청을 찾은 최영훈(가명·33·남)씨는 가족관계 단절을 인정받지 못했다. 부친과 왕래가 끊긴 지 오래라는 점을 통신기록내역서·통장거래내역 사본 등으로 증명하려 했지만, 구청은 단절로 보기 어렵다고 통보했다. 당시 담당 공무원은 안타까워하며 “세대분리 신청을 하려면 세대주가 와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집을 나간 부친 때문에 시작한 세대분리 신청을 마무리하려면, 다시 부친을 찾아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가정폭력을 당한 청년들이 겪는 상황은 더 나쁘다. 가정폭력의 특성상 증거가 잘 남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가 드물다. 가정폭력을 당한 최지혜(25·여)씨도 경찰 신고를 한 적이 없어 세대분리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도망치듯 집을 나왔는데, 그런 서류가 어디 있겠나”라고 토로했다. 가정폭력은 신고해도 제대로 된 조치가 이뤄지지 않거나, 기록이 잘 남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112 신고 내역 보존기간이 1년에 불과해 오랜 기간 가정폭력을 당한 사실을 증명하긴 불가능하다. 정찬송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온 활동가는 “탈가정 청년들은 부모 부양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법적·행정적으로 증명하기 어렵다”라고 했다. 

세대분리를 하지 못해 큰 빚을 지기도 한다. 부채 문제를 겪는 청년들을 지원하는 최유리 대구청년연대은행 디딤 이사장은 “세대분리법 때문에 정책 지원을 받지 못하고, 제2·제3금융권까지 손을 뻗는 청년을 많이 봤다”라며 “세대분리가 돼 이들이 기초생활보장 동아줄이라도 잡을 수 있었다면, 최소한 빚까지 지는 상황에 치닫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성인이 됐는데, 부모 지원이 당연하다고 전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결론적으로 국가가 청년들의 건강한 자립을 돕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취재팀이 인터뷰한 ‘독립제약청년’들의 세대분리 신청·승인 여부 등을 정리한 표.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서대문구는 거절, 동작구는 인정…같은 서류로 오락가락 행정 

20대 청년의 세대분리를 예외적으로 인정하는 ‘특례조항’이 있긴 하다. 해당 조항에는 ‘부양의무자와 가족관계 해체상태로 정상적인 가족 기능을 상실해 정서적·경제적 부양을 받을 수 없는’ 경우, 예외적으로 20대를 독립가구로 인정한다고 적시돼있다. 

하지만 현장에선 특례조항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담당 공무원들이 이런 조항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권씨는 “세대분리 신청을 위해 구청에 갔는데, 담당 공무원이 ‘그게 뭐냐’고 되물었다”며 “절차를 잘 모르는 눈치였다”고 전했다. 이어 “구청에서 어떤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며 “제출할 수 있는 서류를 다 가져오라고만 했다”고 했다. 조만성 다다다협동조합 대표는 “특례조항에 대해 모르는 공무원이 적지 않다”며 “‘30세 미만이라 안 된다’고 거절해 신청서 제출도 하지 못하는 사례가 잇따른다”고 강조했다.

특히 서류 해석에 대한 지침이나 기준이 없어 구청 담당자 재량에 기대는 실정이다. 권씨 사례처럼 구청과 담당자에 따라 해석과 인정 여부가 달라지는 이유다. 탈가정 청년의 목소리를 에세이로 묶어낸 282북스의 강미선 대표는 “가족관계 단절을 인정하는 기준이 구청 담당자의 주관적 판단 뿐”이라며 “거절되면 담당자가 달라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지역을 바꿔서 신청하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1일 서울 영등포구 282북스에서 진행된 쿠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권미희(가명·23·여)씨가 세대분리 신청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사진=유희태 기자

실제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정확한 매뉴얼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필수 제출 서류는 사회보장급여 신청(변경)서, 금융정보 등(금융·신용·보험정보) 제공 동의서 뿐이다. 나머지는 ‘필요자 제출 서류’로 갈음된다. 권씨는 가족관계 해체 및 부양거부·기피 사유서, 가정폭력 쉼터 상담 기록, 청소년 쉼터 상담 기록, 통장거래내역 사본, 실거주 확인서를 추가로 냈다. 

신청자가 직접 수기로 써야 하는 가족관계 해체 및 부양거부·기피 사유서의 경우, 가족과 단절된 청년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가족관계 단절 사유는 가출·실종, 부모의 이혼이나 재혼, 외도, 폭력 등 지극히 개인적이고 민감한 내용이다. 권씨는 “어떤 피해 사실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쓰라고 하기도 하고, 부모님과 현재 어떤 사이인지 쓰라는 곳도 있었다. 힘든 일을 다시 떠올려야 해서 고통스러웠다”며 “사유서를 한 장만 써도 된다는 곳이 있고 부친, 모친을 각각 써서 총 2장을 가져오라는 곳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담당 공무원들 입장에서도 명확한 매뉴얼이 없는 만큼, 보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 부모가 청년 명의 통장으로 1만원을 입금해 경제적으로 단절됐다고 보기 어렵다거나, 통신기록 내역서에 부모가 전화한 기록이 있어 가족관계 단절이 인정되지 못한 사례도 있었다.

정찬송 활동가는 “말 그대로 ‘특례’ 조항이기 때문에 공무원 입장에선 위기 상황에 놓여있는지에 대한 판단보다 가족관계 단절 여부 확인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도 “활동가나 사회복지사, 혹은 의지가 있는 공무원을 만나지 않으면, 20대가 개별가구로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집을 떠난 20대의 자립은 쉽지 않다. 대한민국에선 더 힘들다. 부모의 가정폭력, 일방적 지원 중단, 가출 등 다양한 이유로 집을 떠난 청년들에게 국가는 법적 자립을 허락하지 않는다. 현행 ‘기초생활보장법’은 취업·결혼을 하지 않은 20대 청년을 독립 가구로 인정하지 않는다. ‘30세 이상’만 가능한 세대분리 기준은 일부 청년들을 사회 안전망 밖으로 밀어냈다.

쿠키뉴스 취재팀은 8월21일부터 10월31일까지 2개월간 30세 미만의 ‘독립 제약 청년’들을 직접 만났다. 빈곤 상태여도 기초생활보장 신청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이다. 큰 빚을 지거나, 노숙을 택한 청년도 있다. 세대분리법으로 복지 정책 사각지대에 놓인 한국 20대 청년의 삶을 조명하는 최초의 시도다. 11월4일부터 9편에 걸쳐 보도한다. *‘독립 제약 청년’이라는 언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당사자들의 동의를 구했다. [편집자주] 
김은빈 기자, 최은희 기자
eunbeen1123@kukinews.com
김은빈 기자
최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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