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헌법 체제가 39년째 이어지는 동안 정치권은 번번이 개헌의 타이밍을 놓쳤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각 당의 유불리 계산이 앞섰고, 정권 중후반기에 개헌론이 제기되면 야당은 국면 전환용이라며 제동을 걸었다. 반복된 실패의 공통점은 개헌 필요성을 초당적 합의로 연결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이번에는 다를 수 있을까. 선거 공백기와 후반기 국회 출범, 신임 국회의장의 의지, 개헌에 우호적인 국민 여론까지 외형적 조건은 무르익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여야 대치로 원구성부터 난항을 겪는 데다 양당 지도부 리더십도 불안정해 실제 개헌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의장 의지·국민 여론…열린 개헌의 시간
개헌 논의를 위한 밑작업은 이미 상당 부분 진행돼 있다. 전임 우원식 국회의장 직속으로 설치된 ‘국민 미래 개헌 자문위원회’에는 헌법학자와 법조인, 시민사회 인사 등 30명이 참여해 개헌 의제 전반을 논의해왔다. 여기에는 국민의힘 추천 위원 6명도 포함됐다. 여야 추천 인사가 함께 참여한 국회 차원의 논의가 축적돼 있다는 점에서 과거 개헌 논의와 출발선이 다르다는 평가다.
조정식 신임 국회의장도 지난 6월 5일 본회의 당선 인사에서 개헌 필요성을 강조했다. 조 의장은 “내년은 전국 동시 선거가 없는 해로 헌법 개정 논의를 제대로 해볼 수 있는 절호의 시기”라며 22대 후반기 국회를 ‘개헌국회’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구체적인 의제도 제시했다. 조 의장은 부마항쟁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헌법 전문 명기, 비상계엄에 대한 국회 통제 강화, 권력구조 개편, 감사원의 국회 이관 등을 언급했다. 그는 “국민의 열망과 나라의 미래를 담은 개헌을 꼭 이뤄 시대적 책무를 완수하자”고 말했다.
국민 여론도 개헌에 대체로 우호적이다. 국회사무처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올해 2월 전국 성인 1만256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8.3%가 개헌에 찬성했다. 개헌 방식으로는 합의 가능한 의제부터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69.5%로 가장 많았다. 계엄 선포 시 국회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에는 77.5%가 찬성했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도 개헌론에 불을 붙인 변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점에서 감사원 직무감찰 등 통제 장치를 둘러싼 논의가 법률 개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 선관위개혁 태스크포스(TF)도 선관위 구성 방식과 감사 권한 문제를 개헌 의제로 공식화했다.

실제 개헌 논의가 시작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우선 야당의 태도가 변수다. 국민의힘은 지난 5월 개헌안 표결에 불참하면서 “22대 국회 후반기에 여야가 개헌특위를 구성해 헌법 전문부터 권력구조 개편까지 포괄하는 개헌안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현재는 신중한 기류가 강하다. 개헌에 우호적인 입장을 밝혀온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도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지금은 좀 이른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김 의원은 “선관위 참정권 침해 문제를 먼저 다루고 개혁 진단이 나온 다음에 개헌 이야기를 해야 한다”며 “지금부터 개헌을 꺼내면 국민적 저항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의 발언은 개헌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 접근 순서가 잘못됐다는 지적에 가깝다. 그는 “선관위를 없애든 해체하든 결국 헌법 사항이니 그때 개헌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선관위 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과 제도 개선 논의가 먼저 이뤄져야 개헌 논의도 힘을 받을 수 있다는 취지다.
정치권 상황도 개헌 논의를 차분히 이어가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여야 대치로 원구성이 난항을 겪는 데다 양당 모두 지도부 리더십이 불안정하다. 민주당은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새 지도부 선출 국면에 들어갔고, 국민의힘은 장동혁 대표 사퇴 요구를 둘러싼 내홍이 이어지고 있다.
국회의장실도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의장실 관계자는 “의장님이 개헌 필요성을 강조하셨지만 지금 당장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없다”며 “원구성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개헌의 적기를 강조했지만 이를 현실화할 여야 협상 테이블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셈이다.
헌법학자인 홍완식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선거 부담이 적은 지금을 개헌 논의의 적기로 평가했다. 홍 교수는 “선거 때는 정당 간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기 때문에 선거가 없는 시기가 상대적으로 개헌 논의를 하기에 적기”라고 말했다.
다만 현재 정치 상황에서는 여야가 실제 개헌 논의에 나설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봤다. 그는 “여야 간 갈등과 앙금이 남아 있고 양당 모두 당대표를 포함한 정당의 리더십이 흔들리는 상황”이라며 “개헌 논의를 제안하거나 이끌어갈 구심점이 여야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정치적 영향을 가능한 한 차단하기 위해 별도의 독립된 채널에서 상시적으로 개헌을 논의해야 한다”며 “중립성 확보와 헌정사적 경험, 여야 합의를 고려하면 국회 개헌특위 구성 외에는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결국 관건은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의 결단이다. 전국 단위 선거 부담이 적은 시간, 국회에 축적된 논의, 신임 국회의장의 의지까지 외형적 조건은 갖춰졌다. 그러나 여야가 개헌특위 구성 등 협상 테이블조차 만들지 못하면 이번 ‘적기론’도 다시 흘러갈 수 있다. 개헌의 시간이 열린 것과 개헌이 현실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황인성 기자 his1104@kuk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