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이다니엘 기자] 실력만으로 모든 게 판가름돼야 할 스포츠계에 ‘마이너스의 손’이 닿은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김연아, 박태환 등에게 연달아 압력을 행사한 사실이 드러난 건데요, 공교롭게도 그가 관여를 했거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언급한 선수들은 ‘No.1’이었던 특급스타 뿐입니다. 오늘 쿡기자에선 김 전 차관의 발언에 빗대 우리나라 스포츠계에 만연한 지배욕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22일 SBS는 김 전 차관이 박태환 선수에게 올림픽 포기를 종용하는 과정에서 특정 선수들을 깎아내린 발언이 있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김 전 차관은 박태환에게 “올림픽에 출전하지 않는 대신 김연아처럼 후배들 멘토로 나서 기업 후원을 알아보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권유하면서 “나는 김연아를 참 안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박태환은 올해 4월 광주 남부대 국제수영장에서 열린 제88회 동아수영대회 남자 일반부에서 100m, 200m, 400m, 1500m를 모두 석권하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이 대회는 국가대표 2차 선발전을 겸한 대회로, 박태환은 네 종목에서 올림픽 A 기록기준을 가볍게 통과했었죠.
하지만 김 전 차관에겐 ‘다른 평가기준’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박태환에게 올림픽에 나가지 말라면서 차라리 기업 후원이나 찾아보라고 조롱합니다. 아울러 “이 사실을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유승민은 흠이 있어서 IOC 위원이 될지 모르겠다” “안현수가 금메달 따서 러시아에서 인정을 받아? 걔는 그냥 메달 딴 애야”라고 깎아내렸습니다.
김 전 차관은 “내가 이러이러한 특급 스타들을 쥐락펴락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요. 하지만 김 전 차관이 언급한 선수들은 함부로 입에 오르내릴 만한 선수들이 아닙니다. 유승민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중국의 철옹산성 같은 벽을 넘으며 금메달을 따낸 국민 영웅입니다. 안현수의 경우 동계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다가 계파갈등에 치여 러시아로 귀화한 선수죠. 귀화 전까지 슬럼프를 겪던 그는 러시아 귀국 후 참여한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2관왕에 올랐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은 그가 국내에서 겪은 고충을 아는 터라 ‘배신자’보다는 ‘인간승리’의 대상으로 선망의 눈빛을 보냈습니다.
흠이 있을지언정, 그들이 흘린 땀방울은 박수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김 전 차관은 그들을 그저 발치에 놓인 하인 부리듯 거침없이 발언합니다. 그의 언급은 실력 위주의 선수선발 기준을 부정할 뿐 아니라 선수들의 스포츠맨십을 짓밟는 태도입니다.
스포츠에서만큼은 실력이 최우선 기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날이 올가 싶습니다. 유독 하계·동계올림픽이나 월드컵 시즌만 되면 ‘의리’를 빙자한 선발이 도마 위에 올라 의아함을 자아냅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홍명보 감독은 자신과 연이 깊은 선수 위주로 선발해 질타를 받았고, 위에서 언급한 안현수는 빙상연맹과 ‘갑질 스폰서’에 치여 세계랭킹 1위의 명성이 무색하게 훈련할 공간조차 제대로 찾지 못했습니다. 이 외에도 빙상연맹의 석연찮은 국가대표 선발기준은 4년마다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죠.
오직 연습에 몰입한 선수들의 안타까운 좌절, 최순실의 딸 최유라가 대학에서 ‘모셔간’ 것과 상당히 대조됩니다. 흔히 ‘높은 분’의 말 한 마디면 간단히 명단에 포함되는 권력구조는 스포츠계를 썩어 문드러지게 하는 원흉입니다.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민중은 개돼지”라고 한 발언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한 연습실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선수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었을까요?
유럽축구계에서 ‘악동’으로 불리는 마리오 발로텔리는 감독 말을 듣지 않는 선수로 유명합니다. 그럼에도 그가 세계적인 공격수로 군림할 수 있었던 건 어마어마한 연습량과 그에 따른 골 결정력 때문입니다. ‘한국형’이라는 표현이 요즘 유행합니다만, ‘한국형 발로텔리’가 나오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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