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정재형은 지난해 일본 가마쿠라로 떠났다. 바다를 눈앞에 둔 산 꼭대기, 해가 지면 손전등을 켜야 앞이 보이는 곳에 숙소를 잡고 매일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래를 썼다. 창작은 때로 고통스러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외로움과 쓸쓸함이 온몸을 덮쳤다. 하지만 동시에 행복했다. 자연 속에서 온전히 ‘나’로 지낼 수 있음에 위로를 받아서다. 최근 새 연주음반 ‘아베크 피아노’(Avec Piano) 발매를 앞두고 만난 정재형은 당시를 “마음이 꽉 차 있는 시간”으로 회상했다.
정재형은 왜 ‘고립’을 자처했을까.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털어놨다. “영감을 받아서 곡을 쓰는 때는 지난 것 같다”면서 “피아노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시간이 내겐 필요했다”고 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KBS 라디오 ‘정재형 문희준의 즐거운 생활’ 등 출연하고 있던 프로그램들에서 하차한 것도 이런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피아노와 함께’라는 뜻의 제목처럼, 음반 안에선 관현악기와 피아노가 함께 춤을 춘다. ‘미스트라엘’(Mistral)은 “바람과 첼로의 음색”이 조화를 이루고, ‘라 메르’(La Mer)는 “화려하고 기교가 많은데, 그 속에서 애잔한 슬픔이 나오는 효과”가 좋아 바이올린과의 협주를 넣었다. 피아노 연주만으로 꾸린 전작 ‘르 쁘띠 피아노’(Le petit piano)와는 다르다. 음반은 또한 자연과 함께 하는 피아노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정재형은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고스란히 청자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음악을 엮어냈다고 한다.
2011년 MBC ‘무한도전’ 출연 이후 예능인의 이미지가 강해졌지만, 음악가들 사이에서 정재형으 ‘천재’로 통한다. 대학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했고, 프랑스 유학 도중 영화 음악을 작업하는 등 폭넓은 음악을 아우른다. 그에게 피아노는 “애증”의 존재다. 곡을 쓰는 도구로써 피아노를 접했지만, “피아노를 빼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시간”이 커졌다. 피아노 앞에서 그는 완벽주의자가 된다. 정재형은 “완성도에 대한 집착이 커진다”면서 “음악적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중”이라고 했다.
“내 음악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어요. 내가 의도한 바를 정확히, 그리고 완벽히 구현해내야 한다는 거죠. 작업을 물고 늘어지는 시간이 괴로울 땐, ‘이런 연주 음악을 낼 수 있는 아티스트가 몇이나 되겠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어요. 그런 면에선 음악적으로 자유롭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를 즐기려고 발버둥 치는 거죠.”
연주음악에 어려움을 느끼는 청자를 위해 정재형과 소속사 안테나는 일종의 ‘오디오 북’도 준비했다. 정재형의 육성으로 노래를 소개하는 콘텐츠다. 타이틀곡 ‘라메르’를 틀어두고 정재형이 “잔잔할 때의 바다와 요란할 때의 바다는 양면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데, 그런 모습을 담으려고 했다”고 설명하는 식이다. 안테나 제작실에서 ‘음반 소개서를 작성해야 하니 곡 설명을 보내 달라’고 한 것이 이 콘텐츠의 시작이었다. 제작실장은 “정재형의 설명을 듣고 나니 음악이 다르게 들렸다. 혼자만 듣기 아까워 음성을 사진고 엮어 공개했다”고 설명했다.
정재형은 ‘르 쁘띠 피아노’와 ‘아베크 피아노’에 이어 ‘그랜드 피아노’(가제)로 연주음반 3부작을 마무리한다. ‘그랜드 피아노’는 제목 그대로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웅장한 분위기의 음반이 될 전망이다. 정재형은 “아직은 구상 단계”라면서 “연주음반 3부작을 마무리하는 게, 내겐 큰 산을 넘는 일과 같다. 우선 이 산을 잘 넘고 싶다”고 했다.
“전자 음악을 넣을까, 오케스트라와 협연할까…. 지금은 (‘그랜드 피아노’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단계에요. 언젠가 전자 음악을 심도 깊게 파고 드는 음반을 만들고 싶기도 하고요. ‘다음엔 뭘 해볼까’라는 생각에 신열이 오른 것처럼 들떠 있습니다. 가창 음반도 낼 거예요. 유희열이 이번엔 가창곡이 들어가면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안 되면 미스틱 가서 노래 음반 내려고요. 하하하.”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