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는 작고, 사고는 크고…무더위 사각지대 놓인 ‘중소 사업장’ [폭염, 일터를 덮치다⓶]

규모는 작고, 사고는 크고…무더위 사각지대 놓인 ‘중소 사업장’ [폭염, 일터를 덮치다⓶]

117년 만의 역대급 불볕더위…전국 온열질환자 1228명
온열질환 산재 신청 매년 늘어…절반이 소규모 사업장
전문가 “영세·중소일수록 자율보다 통제 필요”

기사승인 2025-07-12 06:00:07
9일 오후 12시 경기 수원시 영통구 한 사거리에서 시민들이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양산을 쓴 채 걸어가고 있다. 노유지 기자 

예년보다 이르게 찾아온 무더위 속에서 온열질환 산업재해가 급증하는 한편, 소규모 사업장에선 근로자 사고사망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 7일 서울 전역에 전년보다 18일 빠른 폭염경보가 내려졌고, 이어지는 8일엔 서울 기온이 37.8도까지 치솟았다. 117년 기상 관측 이래 7월 상순 최고치다. 전례 없이 빠른 속도의 폭염에 위기감이 커지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근로자의 안전을 시장 자율에 맡기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보다 강력한 제도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11일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인력이 적은 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가 온열질환에 특히나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20년부터 올해 6월까지 온열질환 산업재해로 승인된 건수는 총 145건(사망 사고 17건 포함)이다. 이 중 74건(51%)이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서 발생했고 여기에 사망 사고 14건이 포함됐다.

사업장 규모별로는 ‘5인 미만’ 32건(사망 사고 5건), ‘5~30인 미만’ 29건(사망 사고 7건), ‘30~50인 미만’ 13건(사망 사고 2건)이었다. 규모가 영세한 중소사업장일수록 중대 산업재해에 더욱 빈번하게 노출돼 온 셈이다.

이런 가운데 온열질환자 규모 자체가 나날이 급증하고 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이달 8일 하루 동안 응급실을 방문한 전국의 온열질환자는 238명으로 나타났다. 누적 발생자 수 또한 두 달도 안 되는 단기간에 1000명을 넘겼다. 2011년 질병관리청이 온열질환 응급실 감시체계를 운영한 뒤로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5월15일 온열질환 감시체계 가동 이후 8일까지 누적된 온열질환자 수는 총 1228명으로 집계됐다. 이 중 8명이 사망했다. 지난해보다 5일 더 빨리 가동된 올해 폭염대책기간을 고려하면 환자는 전년 동기(486명) 대비 약 2.5배 증가했다. 특히 실외에서 996명(81.1%)의 온열질환자가 발생했고 야외 작업장에서만 353명(전체의 28.7%)의 환자가 나타났다.

이에 온열질환으로 산업재해를 신청하는 근로자 또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집계된 온열질환 산재보험 최초 요양급여 신청 건수는 8건으로 모두 승인됐다. 요양급여는 근로자가 업무상의 사유로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경우 지급하는 급여다. 다만 3일 이내의 요양으로 치유할 수 있는 부상이나 질병은 예외에 해당한다.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물론 지난달까지 기록된 온열질환 산재보험 신청·승인 건수만으로 정확한 현황을 파악할 수는 없다. 전국 단위로 폭염특보가 내려진 건 이달인 데다, 온열질환자 신고도 7~8월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근로자들이 온열질환으로 산업재해를 신청한 건수는 50건을 훨씬 넘었다. 당시 기록적인 불볕더위가 긴 기간 이어진 탓이었다. 지난 5월 소방청에 따르면 작년 기준 전국의 폭염구급대가 3164건 출동했으며, 온열질환자 2698명이 의료기관으로 옮겨졌다. 이는 2020년부터 5년간 기록된 폭염 대응 실적 중 가장 높은 수치다.

이에 따라 지난해 온열질환 산업재해 신청 건수도 총 57건으로 최근 5년 내 최고를 기록했다. 갑작스러운 반등은 아니었다. 해당 건수는 이미 2020년 14건, 2021년 23건, 2022년 28건, 2023년 37건 등 매년 늘어나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역대급 폭염’이 찾아온 올해도 증가세를 이어갈지 주목된다.

앞서 고용부는 11일 규제개혁위원회에 ‘체감온도 33도 이상 시 2시간 이내 20분 이상 휴식’ 보장 조항에 대한 철회 권고를 재고해 달라고 재심사를 요청했다. 규개위는 이 조항이 획일적이고 중소·영세 사업장에 부담이 될 수 있다며 고용부에 재검토를 권고한 바 있다. 이로 인해 지난달 1일 시행 예정이었던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안 전체가 그대로 연기됐다. 이후 폭염 단계별 대응 가이드라인이 생겼지만 자율에 맡겨 효과는 미미했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중소·영세 사업장일수록 자율보다는 통제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다만 모범 사업자 대상 지원 등 제도 안착을 위한 유인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조언도 제기됐다.

손익찬 공동법률사무소 일과사람 변호사는 “국내 산업안전보건법 체계가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으면 (사업자들은) 노동자 안전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게 된다”며 현행 법체계의 한계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손 변호사는 “사업자들부터가 ‘구체적으로 안 정해졌으면 지킬 수 없다’고 하는 상황”이라며 “강제 규정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문은영 법률사무소 문율 변호사는 “사업자들에게 안전은 바로 비용 문제와 연결된다. 자율로 맡길 시 비용을 감수해야 할 동인이 없다”며 “매년 반복되는 폭염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문 변호사는 “규제도 중요하지만 모범적인 사업자들을 지원할 방법도 논의해 봐야 한다”며 “일방적인 통제가 오히려 감시를 피해 작업하다 사고가 생기는 원인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20분 이상 휴식 의무화’ 조항을 비롯한 산안규칙 개정안이 통과됐다. 세 번째 심사를 마친 규개위는 규정 준수가 어려울 수 있는 소규모 사업장을 중심으로 지원과 홍보 계획을 충실히 마련하고 규정 시행 후 실태 조사를 실시하라고 당부했다. 고용부는 다음주 중으로 해당 개정안을 공포·시행할 계획이다.
노유지 기자
youjiroh@kukinews.com
노유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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