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문에서 좁은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왼쪽 편에, 양쪽으로 날개를 가지고 있는 본관이 도로에서 조금 물러앉아 있는 4층 건물이 나타난다. 리투아니아 국립 필하모닉 협회(Lietuvos nacionalinė filharmonija)다. 1940년에 설립된 이 단체에는 리투아니아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빌니우스 현악사중주단, 실내악단 등이 소속돼있으며, 빌니우스 축제 등 리투아니아의 저명한 축제들을 조직한다.
리투아니아 국립 필하모닉 협회가 들어있는 건물은 1905년에 빌니우스의 위대한 세이마스(Didysis Vilniaus Seimas)라고 하는 리투아니아 의회가 사용하던 건물이다. 건물의 건너편 광장에는 지팡이를 짚고 막 세이마스로 출근하는 모습의 조나스 바사나비치우스(Jonas Basanavičius, 1851-1927)의 동상이 서있다.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바사나비치우스는 먼저 사제가 됐다가 다시 모스크바 의과대학을 졸업해 의사가 됐다. 1880년부터 1905년까지 불가리아 공국에서 의사로 일했다. 당시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 문화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초의 리투아니아 말로 된 신문 아우슈라(Aušra)를 창간하고 리투아니아에 관한 기사를 썼다. 또한 리투아니아 전래동화, 민요, 전설, 수수께끼 등을 수집해 출판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전한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리투아니아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에 바사나비치우스는 귀국대 세이마스로 발전하게 되는 리투아니아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15인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1905년 11월 조직위원회의 이름으로 리투아니아의 자치권을 요구하게 됐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통제를 다시 강화했다.
1907년에는 리투아니아의 역사와 언어 연구를 주관할 리투아니아 과학협회를 설립해 회장을 맡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인 1918년 2월 독립을 선언한 리투아니아 국내의 정치현안이 혼란한 가운데 그는 문화사업에 치중했다.
바사나비치우스의 동상은 그의 탄생 176주년을 맞은 2018년 11월 23일 옛 세이마스 맞은편 주차장을 개조한 장소에 세워졌다. 리투아니아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바사나비치우스가 빌니우스에 돌아오는 날 구시가의 카페와 레스토랑들은 주민을 비롯해 외래 방문객 모드에게 카페 라테와 케익을 무료로 제공했다.
광장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왼쪽으로 교회가 있다. 1618년에 지어진 빌니우스에서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바로크 양식의 성 카시미르 교회다. 얀 프랭키에비치(Jan Frankiewicz)가 설계한 성 카시미르 교회의 공간구성과 외관은 로마에 있는 일 게수(Il Gesù) 교회의 선을 따랐다. 18세기 중반에 건축가 토마스 제브로프스키(Thomas Zebrowski)에 의해 재건됐다.
이때 지붕에 왕관이 달린 계단식 반구상 등화실(lantern cupola)를 세웠다. 왕관 모양의 등화실은 리투아니아 전체에서도 독특한 모습이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이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 3국에 의하여 분할됨에 따라 1795년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로 바뀌었다가, 1915년 독일이 점령했을 때는 복음주의 루터교의 기도실로 사용됐다.
1919년 리투아니아의 독립에 따라 다시 가톨릭교회로 돌아왔지만,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파괴됐고, 1963년에는 무신론 박물관으로 사용됐다. 1991년 리투아니아의 독립에 따라 다시 가톨릭교회로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던 카지미에라스 졸라일라티스(Kazimieras Jogaliatis)의 둘째 아들이던 카지미에라스 성인은 13세에 헝가리 왕으로 봉해진 바 있었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가시미로 성인’이라고 부른다. 성인은 왕자임에도 화려한 생활을 버리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병자 및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했다. 하지만 결핵으로 투병하는 가운데 25살이 되던 해 빌니우스를 방문한 길에 죽음을 맞이했다. 카지미에라스 성인이 보인 최초의 기적은 1518년 모스크바 대공국이 폴로츠크(Polotsk)성을 포위했을 때였다.
리투아니아 군대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군대가 다우가바 강을 안전하게 건너 모스크바 대공국의 군대가 포위한 성을 구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고 한다. 1636년 교황 우르반 8세는 카지미에라스 왕자를 시성(諡聖)했다. 리투아니아 왕가에서는 유일한 가톨릭 성인이다. 카지미에라스 성인에게 헌정된 교회는 빌뉴스의 성 카시미르 교회, 바르샤바의 성 카지미에르 교회를 비롯해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 60여개가 있으면, 미국의 리투아니아 및 폴란드 이주민 공동체에도 50개가 넘는 교회가 있다.
성 카시미르 교회의 건너편에 있는 건물은 빌니우스 시청(Vilniaus rotušė)이다. 빌니우스 시청은 리투아니아에 있는 3개의 역사적 시청 가운데 하나이다. 빌니우스는 1387년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에 의하여 마그데부르크 법(Maggeburger Recht)에 따른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마그데부르크 법은 신성 로마제국의 오토 1세 황제가 제정한 도시법이다.
일정한 지역의 지배자가 도시 혹은 마을의 자치권을 승인하는 내용에 관한 법률로서, 상법, 형법, 절차법 등을 규정한다. 15세기에 자치권이 인정된 리투아니아의 도시로는 빌니우스(1387년), 카우나스(1408년), 트라카이(1409년), 그로드노(1391년)에 제한적으로 적용하다가 1496년에 전면 시행) 등이 있었다.
빌니우스 시청이 처음 언급된 것은 1432년으로 고딕양식의 건물이었는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재건됐다. 초기의 시청에는 회의실, 법정, 상인공동체 사무실, 저울실, 곡물저장소, 무기창고 등이 있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시청은 전쟁과 화재가 반복되면서 파괴됐다.
현재의 빌니우스 시청은 1799년에 로리나스 구세비치우스(Laurynas Gucevičius)의 설계에 따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재건된 것이다. 현 건물에는 고딕양식의 지하실이 보존돼있다. 1811년 시청에는 작은 극장이 들어왔는데, 그해 시청 내부를 개조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이 파괴됐다.
극장은 시청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확장되다가 1922년 폐쇄됐는데, 이후 시청건물은 버려져 쇠락하기 시작했다. 1936~1939년 사이에 빌니우스 건축가 스테파나스 나렘브스키(Stefanas Narembskis)가 맡아 복원했다. 내부의 구조는 18세기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는데 중점을 뒀다. 시청광장(Rotušės aikštė)은 빌니우스 시의 전통적 행사의 중심이다.
15세기 초반까지 광장에는 소금, 철, 육류를 취급하는 작은 규모의 상점들이 있었다. 모든 상점들은 엄격하게 규제받고 있어 자유롭게 상점을 팔거나 양도할 수 없었다. 매년 3월 4일 열리는 카지코 머그레(Kaziuko mugė)는 17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빌니우스의 대규모 민속 예술 및 공예 박람회다.
이 박람회는 전통적으로 카지미에라스 성인이 죽은 3월 4일에 가장 가까운 일요일에 도시의 시장과 거리에서 열린다. 오늘날에는 음악, 댄스, 연극 공연도 함께 열린다. 박람회 기간 동안 직조 혹은 니트 의류, 신발, 장난감, 기구, 냄비나 주전자, 보석류, 그림 등 리투아니아 장인들의 수제품이 팔리며, 호밀빵, 베이글과 비슷한 부블릭(bubliks), 생강빵, 천연 벌꿀, 맥주, 기라(gira, 크바스의 리투아니아 이름)와 같은 전통식품들도 맛볼 수 있다.
시청 광장에서는 마침 러시아에서 온 어린이 무용단이 라틴댄스 공연을 하고 있었다. 광장의 바닥은 벽돌이 깔려있고, 굽이 놓은 신발을 신고 있어서 쉽지 않았을 터이나 현란한 춤사위를 뽐냈다. 교대로 나와 춤을 추는데, 춤이 끝나면 자리로 돌아가 가쁜 숨을 쉬면서도 틀리지 않고 제대로 춤을 표현했다는 기쁨이 얼굴에 드러났다.
시청광장의 분수대에서 가까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친위대가 운영한 게토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이전에 빌니우스에 살던 유대인은 최소 6만에서 최대 8만명에 이르렀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유대인들은 소련으로 피난했다. 1941년 6월 26일 빌니우스에 입성한 독일군은 9월 6일 이전에 2만1000명의 유대인들을 처형했다. 그리고 4만여 명을 빌니우스의 게토에 수용했다.
이들은 2년 동안 굶주림, 질병, 학대, 거리 처형의 희생자가 됐으며 강제수용소로의 이송 등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니우스의 게토에 거주한 사람들의 지적이고 문화적 삶을 유지하여 게토의 예루살라임(Yerushalayoim of the Ghetto)라고 했다. 전쟁 전에 빌니우스는 리투아니아의 예루살렘으로 알려졌다.
게토골목에는 리넨이나 호박을 파는 가게들과 식당들이 이어져 있었다. 골목 위에는 열기구를 걸어 이채로웠는데, 어쩌면 축제기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골목의 끝에는 빌니우스 게토 기념물이 있다. 건물의 담장에 희생자의 사진을 걸어두거나, 게토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골목을 빠져나가면 빌니우스 대학이다. 도서관 철학과 건물이 이어진다. 그 맞은편으로는 리투아니아 대통령궁이다. 아치형의 출입문에는 철창으로 된 문을 달았는데, 문 사이로 보이는 정원에는 지난해에 리투아니아 독립 100주년을 맞아 설치해둔 장식을 볼 수 있었다.
대통령궁의 건설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투아니아 대공이자 폴란드 왕인 요가일라(Jogaila)는 빌니우스 교구에 토지를 기부했다. 그 땅에 빌니우스 교구의 초대 주교 빌니우스 안드라제 야스트레비에츠(Vilnius Andrzej Jastrzębiec)가 집을 지었기 때문에 주교의 중전이라고 불렀다. 주교의 궁전은 여러 세대에 걸쳐 확장되고 개축됐다.
18세기에는 궁전에서 극적인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됐고, 1737년과 1748년의 두 차례에 걸친 큰 화재로 궁전이 심하게 손상돼 1750년에 재건했다. 파벨 페트로비치(Па́вел I Петро́вич, 1754~1801),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1777~1825) 등 러시아의 차르를 비롯해 러시아 원정길에 나선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도 이 궁전에 머물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군장교 센터로 활용하다가 1997년 이래 대통령의 공식 사무실과 주거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