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인세현 기자=도깨비 외계인 저승사자 구미호…. 인간의 형상을 했으나 인외존재인 주인공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그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일단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능력을 갖췄다. 능력의 성질과 범위는 조금씩 다르지만 마음 먹으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건 일도 아니다. 비범한 능력 덕분일까. 재력도 남다르다. 두 번째는 권태다. 이들은 너무 오래 존재했기에 세상사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늘 무료한 상태다. 새로 등장한 주인공 멸망 또한 마찬가지다. 존재 자체로 멸망의 이유가 되는 그는 권태를 느끼다 못해 세상의 멸망을 바란다. 그가 속한 시스템이 멈추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tvN 새 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이하 ‘멸망’)은 사라지는 모든 것들의 이유가 되는 존재 멸망(서인국)과 사라지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건 계약을 한 인간 동경(박보영)의 판타지 로맨스다. 오랜만에 안방극장에 복귀한 박보영과 서인국이 로맨스 호흡을 맞춘다. 배우 이수혁, 강태오, 신도현도 출연한다. 드라마 ‘뷰티인사이드’의 임메아리 작가가 대본을 집필했고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의 권영일 PD가 연출을 맡았다.
지난 10일 전파를 탄 첫 회에서는 교모세포종으로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동경과 멸망의 만남이 그려졌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동경은 병원을 나선 이후로 연달아 찾아온 불행에 시달린다. 애인이 유부남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직장상사는 폭언을 한다. 지하철에서 불법촬영 범죄자를 만난다. 이상한 하루를 마치고 부모님의 기일을 챙긴 동경은 술을 마신 뒤 떨어지는 유성을 보고 외친다. “세상 다 망해라. 다 멸망해 버려. 멸망시켜줘.”
술기운 섞인 동경의 소원은 멸망의 귀에 들어간다. 자신의 생일에 인간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그는 동경을 찾아가 ‘세상을 멸망 시켜달라’는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 처음엔 멸망을 피했던 동경은 결국 멸망과 아슬아슬한 계약을 맺는다.
판타지 로맨스 장르에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주인공, 세상의 멸망을 바라는 멸망.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의 만남이 흥미롭다. 멸망은 소원 접수를 주저하는 동경에게 ‘한 가지 소원을 더 들어주겠다’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이 또한 세상의 멸망을 바라야만 가능하다. 권태와 환멸로 세상의 멸망을 바라던 멸망이 동경과 만나며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도 관심사다.
전능에 가까운 능력의 멸망은 인내가 익숙한 인간 동경과 매우 다른 듯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두 사람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동경은 다시 묵묵히 자기 일을 한다.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다. 하다 보니 하게 된 일이다. 그런 동경에게 멸망은 “대표도 싫고 회사도 싫은데 회사는 왜 다녀?”라고 묻지만, 이 질문은 사실 멸망에게 가장 유효하다. 멸망 또한 상급자인 신(神)과 세상이 정해놓은 굴레 속에 멸망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멈추기 위해 세상의 멸망을 바라지만, 이는 멸망의 능력 밖이기에 동경의 손을 잡으려 하는 것이다.
‘멸망’은 멸망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러한 장치를 통해 삶과 존재에 관해 묻는다. 자의가 아닌 타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우선해야 했던 동경과 멸망은 서로를 마주한 뒤 새로운 존재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까.
다수의 로맨틱 코미디에서 활약했던 박보영은 ‘어비스’ 이후 2년 만에 안방극장에 돌아와 자신의 특기를 마음껏 자랑했다. 살날이 100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를 실감하지 못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동경의 모습을 안정적으로 그려내며 극의 중심을 잡았다. 다만 멸망 역을 맡은 서인국의 연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신과 인간의 중간관리자, 사라지는 모든 것의 이유가 되는 존재라는 난해한 캐릭터를 시청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표현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 볼까
오랜만에 돌아온 박보영을 믿고 보고 싶은 시청자에게 추천. 인외존재가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를 즐겨 본 시청자에게도 권한다.
◇ 말까
대사를 곱씹고 따로 설명을 봐야 할 것 같은 드라마를 기피한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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