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한 의약품을 완성할 역량이 있어도, 원료가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12일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한국제약바이오협회가 주최한 ‘위기의 한국 원료의약품산업 활성화 방안은?’ 정책토론회에서 장병원 한국제약바이오협회 부회장은 국내 원료의약품 자급률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는 “우리나라 제약산업은 원료의 대부분을 중국이나 인도에서 들여와 해외 의존도가 매우 높다”며 “외국에서 공급망에 문제가 생기면 완제의약품 자급률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우리나라는 원료의약품 산업 불모지에 가깝다. 국내 제약업계의 완제의약품 자급률은 2019년 74.1%에 달했다. 하지만 완제의약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원료의약품의 자급률은 같은해 16.2%까지 하락하는 위기를 맞았다. 2020년 들어 완제의약품 자급률은 68.8%, 원료의약품 자급률은 36.5%로 상황이 나아졌지만, 격차는 여전했다.
원료의약품 시장의 규모는 점차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건산업정책연구센터 연구에 따르면 글로벌 의약품 시장 규모는 오는 2025년 1조5900억달러, 원료의약품 시장은 2514억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 기업의 도전도 계속되고 있다. 앞서 2020년 기준 원료의약품 매출액 상위권에 오른 △대웅바이오(3303억800만원) △경보제약(1671억5400만원) △유한화학(1237억6600만원) △화일약품(1236억1300만원) △동국생명과학(1095억8200만원) 등이 성과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국내 기업들의 원료의약품이 국내에서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기업들 대부분은 아일랜드, 일본, 미국 등으로 수출을 진행해 매출을 유지하고 있다. 매출 상위 기업들의 수출 비중을 보면 △대웅바이오(6.5%) △경보제약(60.1%) △유한화학(85.7%) △화일약품(3.8%) △동국생명과학(17.7%) 등으로 집계됐다.
국산 원료를 수출하고 나면, 정작 우리나라 제약업계는 수입 원료를 들여온다. 주로 중국(36.1%), 일본(12%), 인도(10.6%)의 원료를 수입하고 있다. 제약산업전략연구원이 국내 49개 제약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수입 원료의약품을 50%이상 사용하는 기업은 37개(76.1%)로 파악됐다. 이 중 4개(8.7%) 기업은 100% 수입 원료의약품을 사용하고 있다.
원료의약품 자급률이 저조한 원인은 한둘이 아니다. 우선, 가격과 품질 측면에서 경쟁력이 없다. 이에 대해 제약업계는 정부의 지원 정책이 미흡하다는 고충을 토로한다. 원료의약품에 특화한 지원 정책이 전무하고, 특히 국산 원료의약품의 제품화에 따른 약가우대 제도가 없어 기업의 자생이 어려운 시장 생태계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이웃한 중국 시장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따라 가격경쟁력이 증대되는 상황이다.
협소한 국내 시장 환경도 원인으로 꼽힌다. 품질과 가격 측면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대량생산, 대량유통을 통한 ‘규모의 경제’ 효과를 일으켜야 한다. 하지만 현재 국내 시장은 저렴한 완제의약품 위주로 난립한 중소규모 제약사가 출혈 경쟁을 벌이는 구도다. 시장이 좁고, 규모의 경제 효과도 기대할 수 없는 원료의약품 시장에 기업들이 선뜻 도전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시장이 좁은 만큼, 원료의약품에 특화된 연구인력과 생산인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원료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BGMP)과 원료의약품 등록제도(DMF)가 요구하는 각종 인허가 규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인적자원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국내외 판로 개척은 난제로 남게 된다. 진입하는 기업은 차치하고, 기존 기업도 고전한다.
원료의약품을 둘러싼 법률이 발목을 잡는다는 견해도 있다. 가령 원료의약품을 개발하려면 신규화학물질 등록을 마쳐야 하는데, 화학물질의 유해성자료를 지정된 시험기관에서 도출해 제출해야 한다. 이 과정은 최소 9개월이 소요되며, 등록비용은 물질 한 건당 7000만원에서 1억2000만원까지 소요된다.
원료의약품의 낮은 자급률은 보건의료 안보에 치명적인 리스크다.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무역 갈등이 발생하면, 100% 수입에 의존하는 원료의약품이 포함된 완제의약품은 국내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는 셈이다. 특히, 감염병·응급의료·재난대응 등에 필요한 ‘국가필수의약품’으로 지정된 품목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타격은 더 크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조사 결과, 해외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의약품 72품목 중 필수의약품에 포함되는 품목은 55개에 달했다.
정순규 보건산업정책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국산 원료의약품 생산 및 사용에 대한 인센티브와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며 “국내 원료의약품 사용이 확대되면 기업들 역시 제조 시설 및 품질개선에 투자할 여력이 생겨 품질개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민권 종근당 대외협력팀 이사는 “규모가 충분히 크지 않은 원료의약품 기업들이 설비와 품질에 투자할 수 있는 자본은 한정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기업들은 단순히 국내 자급률을 일정 수준 올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를 목표로 해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공급망을 정비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산업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영미 한국산업약사회 부회장(명문제약 생산본부장)은 “현행 화학물질 등록관리 제도는 시간 및 자원 낭비가 심하다”며 “등록 비용증가로 원료의약품 생산단가가 상승하고, 가격경쟁력은 낮아지는 악순환”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임상용 원료도 신규화학물질 등록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촌각을 다투는 의약품 신약개발 시장 경쟁에 뒤처질 우려도 있다”고 덧붙였다.
안명수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 본부장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팬데믹을 계기로 확인한 ‘백신민족주의’를 통해 제약주권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됐다”며 “국내에서도 주기적으로 의약품 수급 문제가 나타나는 만큼, 해외 의존도를 낮추는 데 정부와 민간 모두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특히 공급이 중단되면 국민 건강에 미치는 위험이 큰 필수원료의약품부터 국내 개발 및 생산 인프라를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