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완 눈빛이 돌았다.’
영화 ‘비상선언’(감독 한재림) 개봉 후 온라인에서 가장 많이 쏟아진 평가다. 반듯한 외모 덕에 일찍부터 ‘얼굴 천재’로 불린 배우 임시완에게 ‘돌았다’라니. 8일 화상으로 만난 임시완은 “기분 좋은 반응”이라고 했다. “악역을 맡은 입장에선 (눈빛이 돌았다는 평가가) 굉장히 큰 칭찬이잖아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임시완이 연기한 류진석은 ‘비상선언’에서 벌어진 재난의 원흉이다. 직접 조작한 바이러스를 하와이행 비행기에 뿌려 승객들을 죽게 한다. 임시완은 “대본으로 처음 접한 류진석은 절대 악 같았다”고 했다.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 속 타노스(조슈 브롤린),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감독 매튜 본)의 발렌타인(사무엘 L.잭슨)처럼 “신념이 뚜렷한 악역”을 좋아한다는 그는 류진석에게도 악행을 저지른 당위성을 입히려고 애썼다. “그래야 캐릭터의 말과 행동을 일관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류진석의 악행이 왜곡된 가치관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을 납득시키는 명분이 있을 거라고요. 그가 왜 테러를 신성한 행위로 여기는지, 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지 나름 논리적인 서사를 만들어보려고 했어요. 덕분에 백지를 마음대로 채우며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어요. 선한 인물을 맡으면 지켜야 할 선이 있기 마련인데, 악역은 그렇지 않아 해방감도 느꼈고요.”
임시완은 류진석이 외국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괴롭힘을 당했을 거라고 봤다. 내면에 인간을 향한 불신이 쌓여 자신을 도우려는 사람에게조차 피해의식을 느꼈으리라고 상상했다. 결국 류진석이 ‘미개한 인간들을 없애 세상을 정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거라고 임시완은 분석했다. 다만 그는 자신이 해석한 류진석의 전사를 작품 안에서 뽐내려고 하진 않았다. 관객을 감정적으로 설득하기보다는 류진석을 실제 있을 법한 존재로 그려내는 데 중점을 둔 결과였다.
캐릭터와 혼연일체가 된 덕분일까. 그는 의도하지 않고도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류진석이 박재혁(이병헌)의 딸 수민(김보민)을 바라보는, 일명 ‘돌아버린 눈빛’도 그 중 하나다. 이 장면은 원래 리허설이었지만 한재림 감독이 본편에 넣었다. 임시완은 “감독님의 선구안 덕분에 연기를 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류진석이 기내 전화기에 대고 악다구니 쓰는 장면도 우연히 탄생했다. “(김)남길 형, (김)소진 누나와 전화기로 장난을 치는데, 감독님이 ‘방금 그 장면 좋다’고 하셔서 실제 촬영 때도 비슷하게 찍었어요. 재밌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런 임시완을 두고 배우 송강호는 “영화 ‘범죄도시2’(감독 이상용)에 손석구가 있다면 우리에겐 임시완이 있다”고 칭찬했다. 두 사람은 영화 ‘변호인’(감독 양우석) 이후 10여년 만에 ‘비상선언’에서 재회했다. 임시완은 송강호뿐 아니라 이병헌·전도연·김남길·김소진 등 기라성 같은 배우와 어깨를 겯었다. 그는 “선배들의 취향, 취미, 생각 등을 따라가면 정답에 도달하리라는 기대가 있어 현장에서 질문을 많이 했다”면서 “한 작품만으로 선배들의 성공 공식을 파악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유추해보려고는 해봤다”고 돌아봤다.
정답을 갈구하는 배우, 연기 칭찬이 가장 기쁘다는 배우, “기능적인 연기는 피하고 싶다”는 배우, 미래를 기대하기보다 현재의 고민에 몰입하는 배우…. 연기를 대하는 임시완의 태도는 흡사 구도자 같았다. 그룹 제국의 아이들 멤버로 데뷔해 2012년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로 연기에 발을 들인 그는 “연기를 통해 대중에게 처음 인정받았다”면서 “내 적성에 잘 맞고, 평소에도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게 연기”라고 말했다.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 여럿 있죠. 첫 작품인 ‘해를 품은 달’, 연기 정점에 계신 선배님들과 호흡하며 연기자로서 가야 할 방향을 알려준 ‘변호인’, 긍정적인 이미지를 준 tvN ‘미생’, 한 가지 이미지에 갇힐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준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감독 변성현)…. 악역이든 선한 인물이든, 새로운 캐릭터를 계속 만나고 싶어요. 저는 새로움에서 매력을 느끼거든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