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 배우 이성민이 영화 ‘대외비’(감독 이원태) 개봉을 앞두고 처음 언론 인터뷰를 하는 자리. 20명 넘는 기자들이 오전 이른 시간부터 인터뷰 장소에 모여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JTBC ‘재벌집 막내아들’ 종영 이후 이성민을 인터뷰할 기회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주어진 1시간이 쏜살같이 느껴졌던 걸까. 이성민은 홍보팀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인터뷰를) 5분만 더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제가 좀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이런 자리, 무척 불편했는데….” 지천명을 넘긴 중년 배우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성민은 최근 출연작에서 시간을 자주 달렸다. 지난해 10월 개봉한 영화 ‘리멤버’(감독 이일형)에선 알츠하이머를 가진 80대 노인으로, 연말 종영한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는 노년의 재벌 회장으로 변신했다. ‘대외비’에서도 이성민은 늙수그레한 모습이다. 그가 맡은 역할은 은둔의 비선 실세 권순태. 막대한 부를 토대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점이 얼핏 ‘재벌집 막내아들’ 속 진양철 회장과 비슷하지만, 이성민은 “두 캐릭터는 다르다”고 했다. 외모만 보더라도 2대8 가르마를 고수한 진양철과 달리, 권순태는 바짝 자른 스포츠머리로 야수성을 가늠하게 만든다.
촬영 시기를 따지면 ‘대외비’가 먼저다. 3년 전 촬영을 마쳤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개봉이 미뤄졌다. 그 사이 ‘리멤버’와 디즈니+ ‘형사록’, ‘재벌집 막내아들’이 연달아 공개돼 ‘노인 전문 배우’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노인 연기 잘하는 노하우요? 그런 건 없어요. 하하하. 이제 노인 연기는 그만해야 할 것 같아요.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해야죠.” 이성민은 “한국 작품을 보는 한국 관객 입장으로선 조금만 빈틈이 보여도 몰입이 깨져서 나와 다른 연령대의 인물을 연기하기가 더 어렵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성민을 ‘대외비’로 이끈 건 “이원태 감독을 향한 호기심”과 “보스 같은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권순태는 부산을 쥐락펴락할 만큼 입김이 세지만 정작 과거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 이성민은 “(시나리오에도) 과거가 안 나온다. 그의 사연을 관객의 상상에 맡겨보고자 미스터리한 인물로 남겨둔 것 같다”고 했다. 영화에서 권순태는 내내 한쪽 다리를 전다. 줄무늬가 그려진 정장, 원색 스카프 등 은근하게 화려한 의상도 눈에 띈다. 젊은 시절 권순태가 어둠의 세계에 몸담았으리라 짐작케 하는 요소들이다. 이성민은 이런 외모와 의상 등을 직접 디자인했다고 한다.
이성민은 삶 자체가 영화 같은 배우다. 20대 시절 경북 영주와 대구에서 극단 생활을 하다가 tvN ‘미생’으로 마흔이 넘어 빛을 봤다. 무명 시절 배가 고파 눈물이 났다는 그는 각종 영화제 배우상은 물론, 국무총리 표창까지 받을 정도로 대성했다. 요즘 그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회장님’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이 시청률 26.9%를 기록하며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은 덕분이다. 정작 이성민은 “한 달이면 사그라들 인기”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간이 지나니까 (호응이) 깔끔하게 끝나더라”며 웃는 그에게서 삶의 고저를 숱하게 오르내리며 찌운 근육이 느껴졌다. 한때 “캐릭터와 나를 완전히 분리시키려고 했다”는 이성민은 “나이를 들면서 많은 것이 편해졌다”고 말했다.
“스무 살 때 연기 선생님이 제게 묻더군요. 너 자신을 본 적 있냐고. 그게 20대 때 제 화두였어요. 시간이 흐르며 점점 아는 것 같아요. 내가 누구인지, 어떤 목소리와 정서를 가진 사람인지. 저는 가느다란 나일론 줄 같은 배우예요. (‘대외비’에서 함께 연기한) 조진웅은 굵은 동아줄 같은 배우고요. 때론 동아줄이 부러워요. 그런 배우를 쫓아가고 싶은 마음도 들죠. 하지만 세상에는 배우의 숫자만큼 많은 연기 방법과 캐릭터가 존재하거든요. 동아줄 같은 배우를 만나든 쇠사슬 같은 배우를 만나든,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어울리는 데서 연기가 시작한다고 믿습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