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피해자인 문동은(송혜교) 가해자 박연진(임지연)을 “연진아”라고 부른다. 증오하는 상대에게 다정스러운 호칭을 붙인 것만도 서늘한데, 이름을 읊조리는 목소리가 건조해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전국을 ‘연진아’ 타령에 빠뜨린 작품은 지난 10일 파트2가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 17일 서울 신사동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임지연은 “이름이 연진으로 바뀐 기분”이라며 “심지어 엄마마저 ‘연진아 찌개 끓여뒀어’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고 말했다.
박연진은 ‘더 글로리’의 분노 유발자였다. “이제부터 네가 ‘고데기’ 열 체크 좀 해줄래?” 그가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친구들은 문동은을 끌고 가 미용 기기로 그의 팔을 지진다. 박연진은 어른이 돼서도 반성을 모른다. 사과할 기회를 주겠다는 문동은에게 “널 상대할 ‘고데기’를 다시 찾겠다”고 반격한다. 그가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치켜뜨고, 코를 찡긋하며 문동은을 비웃을 때마다 시청자들 혈압도 올라갔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미워하면 좋겠다”는 임지연의 바람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던 탈북소녀(MBC ‘불어라 미풍아’ 속 김미풍)는 어떻게 피도 눈물도 없는 학폭 가해자가 됐을까. 임지연은 “내 모습 자체로 연기해 보자”고 했다. “아무 감정 없는 무채색으로 연기할까, 아니면 어디서든 미친 듯 난동 부리는 캐릭터를 만들까 온갖 아이디어를 끌어모았어요. 그런데 그냥 제 모습으로 연기해야 새로운 악역이 나오겠더라고요. 제게 가장 편한 몸짓과 표정을 활용하니 박연진이 완성됐습니다.” 데뷔 14년 차 배우에겐 주름마저 연기 도구가 됐다. 그는 “미간에 잡힌 주름, 짙은 눈썹, 큰 입 등 내 얼굴을 과장되게 썼다”며 “나도 방송을 보며 ‘내게 저런 표정도 있구나’ 하고 놀랐다”고 귀띔했다.
임지연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쁜 X이 자”며 입에 욕을 붙이고 담배 피우는 법도 배웠다. 악을 쓰느라 목이 쉬고 ‘내가 제일 빛나고 화려하며 나빠야 한다’는 압박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그는 박연진에 마음을 붙였다. 얼핏 순수 악처럼 보이는 박연진이지만 임지연은 여러 겹의 감정을 쌓아 올렸다. “절대 무너지지 않아야 하는 인물이지만 그 안에 불안과 흔들림이 있어야 한다”는 안길호 감독의 주문에 따른 연기다. 뒷배 같던 엄마에게 외면당하자 박연진은 무너져 오열한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게 연진에겐 가장 큰 벌이었을 거예요. 이후 연진이 명찰을 보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선 절망에 무너져 정신을 놓은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가장 어려웠던 장면은 교도소에서 날씨 예보를 하는 마지막 장면. 그는 광기, 절박함, 분노가 뒤섞인 눈빛과 기괴한 웃음을 얼굴에 새긴 채 눈물을 흘린다. 임지연은 “연진이가 자기 죄를 돌려받는 장면”이라며 “반년 넘게 연진이로 살아서인지 마지막 장면을 찍고 난 후엔 좌절하고 공허했다”고 돌아봤다. 이런 열연에 배우들은 물론 시청자도 ‘과몰입’에 빠졌다. 그의 SNS는 ‘연진아’를 부르는 댓글로 도배됐다. 연진의 악행은 국적을 초월해 분노를 일으켰다. 넷플릭스에 따르면 ‘더 글로리’ 파트2는 10~12일 전 세계에서 1억2446만 시간 시청됐다.
“천사 같은 얼굴로 악마를 보여주자”며 ‘더 글로리’에 뛰어든 임지연은 차기작인 tvN ‘마당이 있는 집’에서 남편에게 맞고 사는 여자를 연기한다. “저를 못 알아보실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감할 만큼 연진과 정 반대 캐릭터다. 그는 데뷔 초 연기력 논란에도 시달렸지만 “나는 타고난 배우가 아니니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저를 아는 분들은 ‘더 글로리’를 보고 많이 우셨대요. 제가 얼마나 노력했을지 느껴진다고….” 임지연은 이렇게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자신이 “언제 또 무너질지 모른다”고, 작품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스스로 너무 많이 괴롭혀 힘들다”고 했지만, 임지연은 “느리더라도 꾸준히 성장하는 내가 좋다”고 했다.
“저는 항상 절실했어요. 늘 노력했고요. 현장에서 혼나고 우는 날도 많았지만, 작품 안에서 매번 새로운 걸 배웠어요. 어떤 작품에선 카메라 각도에 맞춰 서는 법을, 또 다른 작품에선 캐릭터 분석을 하는 법을 배웠죠. 넷플릭스 ‘종이의 집’ 파트2를 통해 내가 원하는 캐릭터라면 분량에 상관없이 도전해도 된다는 걸 배웠고, 티빙 ‘장미맨션’을 하며 작품을 이끄는 법을 배웠어요. ‘더 글로리’는 제게 가장 큰 용기이자 도전입니다.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그걸 굳세게 떨쳐낸 것만으로도 저를 칭찬해주고 싶어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