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속 ‘한국의료’…“의료개혁 이뤄져야” [의료 난맥⑦]

터널 속 ‘한국의료’…“의료개혁 이뤄져야” [의료 난맥⑦]

기사승인 2025-03-16 06:00:12
의과대학 입학 정원 확대를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대치가 계속되는 사이 의료의 질은 떨어졌으며, 환자들은 응급실을 찾아 헤매고 암 수술을 미루는 등 피해가 쌓였다. 전공의가 병원을 이탈하면서 세계 최고의 시스템을 자부하던 한국 의료는 휘청였다. 의료현장에선 “터질 게 터졌다”는 탄식이 나온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한숨이 깊어지는 가운데 지속가능성을 불어넣기 위해 짚어야 할 한국 의료의 민낯을 일곱 편에 걸쳐 전한다. [편집자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박효상 기자

의과대학 입학 정원 증원 정책을 펼 때마다 정부와 의료계가 갈등을 빚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응급실을 찾아 헤매는 일은 반복되고 지방 의료 상황이 열악해지면서 환자와 의사 모두 피해를 보고 있지만, 의대 증원 문제에 매몰돼 지역·필수의료 강화라는 의료개혁의 본래 목적이 가려지고 있다. 필수의료 공백을 해소하고 의료체계를 보강하는 협력의 길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올해를 의료개혁의 원년으로 삼고 흔들림 없이 완수하겠다.” 정부는 지난해 2월6일 의대 입학 정원 확대 규모를 확정 발표했다. 오는 2035년에 의사 수가 1만5000명 부족해질 것에 대비해 기존 연간 의대 정원인 3058명에서 2000명을 늘려 5058명을 모집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계산이었다. 

정부는 “의대 정원을 의사와 협상해서 결정하는 사례는 어디에도 없다”며 강경한 자세로 정책을 추진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료인들이 불법적 행동을 한다면 법에 부여된 의무에 따라 원칙대로 대응하겠다”며 의료계에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 발표 한 달 만에 전공의가 집단 이탈하면서 대형병원이 마비됐다. 의대 교수들은 사직을 결의했으며, 수업을 거부하는 의대생이 줄을 이었다. 급격히 번진 의료 현장의 혼란으로 인해 환자들의 피해가 속출했고 정부는 비상진료체계를 가동했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직 전공의들의 복귀는 요원하다. 정부가 2026학년도 의대 모집인원을 의대생 복귀를 전제로 증원 전 규모인 3058명으로 동결하겠다며 백기를 들었지만, 의대생들은 “해결된 게 없다”며 요지부동이다. 서울 상위 대학들은 기한 내 복귀하지 않는 학생을 학칙에 따라 제적하겠다고 경고한 상태다. 이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24·25·26학번이 동시에 같은 학년 교육을 받는 ‘트리플링’이 발생해 의대 교육이 무너지고, 의사를 제대로 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의대 학생은 학칙에 의거해 출석 일수의 4분의 1 이상 수업을 듣지 않으면 F 학점으로 처리돼 유급 대상이 된다. 출석 일수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시한이 바로 이달 말까지다. ‘복귀 디데이’가 3주도 채 남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의대 학장들은 학생 복귀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정은 서울의대 학장은 서한을 통해 “학업 공백이 더 지속되면 학생 여러분의 자리를 원상복구하는 일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붕괴까지 심각하게 우려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며 “결단을 내려야 한다.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다. 학교로 돌아와 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의료계 거센 반발…‘정책 좌초’ 반복

정부가 의료계의 격렬한 반대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 공식 발표에 앞서 약 1시간 전에 열린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위원들 사이에서도 “2000명 증원은 전공의와 학생은 물론 전체 의사들의 큰 반발을 부를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의대 증원에 따른 파장이 예견됐으나, 정부는 의료개혁 정책을 밀어붙였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중앙재난안전상황실 서울상황센터에서 열린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제공

하지만 지난 1년간 의료계의 강한 저항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책 결정은 잇따라 뒤집혔다. 원칙과 엄정한 대응을 강조했던 정부는 의료공백 사태가 시작된 지 5개월 만인 지난해 7월 미복귀 전공의들에게 면허 정지 등 행정처분을 하지 않기로 했다. 수업을 거부 중인 의대생들도 유급되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럼에도 전공의·의대생 복귀가 저조하자 정부는 이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감수하고 각종 특례를 약속했다. 정부는 ‘불법 집단행동에 면죄부를 줬다’, ‘유례를 찾기 힘든 특혜를 제공했다’, ‘공정성을 포기했다’ 등의 비판에 직면했다. 시민단체는 “의료계의 집단행동에 끌려간다”며 정부의 입장 번복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등 단체는 지난 10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는 복귀하지 않은 전공의와 의대생에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양보만 거듭했다”라며 “정부와 국회는 도대체 언제까지 의사 집단의 요구에 굴복할 것인가”라고 일갈했다. 내년 의대 정원 3058명 동결 발표에 대해선 “의사 집단에 무릎을 꿇는 초라한 백기 선언”이라고 평가했다. 정책 철회는 국민을 위한 결단이 아닌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한 타협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정책 추진 과정에서 의료계는 반대하고 정부가 일정 부분 양보하는 행태는 의정 갈등이 빚어질 때마다 재현되고 있다. 2000년 의약분업 사태, 2014년 원격의료와 의료법인 영리화 사태, 2020년 의대 증원과 공공의대 도입 사태, 2024년 의대 증원 사태까지 같은 흐름이 반복됐다. 정부는 의료인력 수급추계위원회에서 2027학년도 이후의 의대 정원을 정할 방침이지만, 이 역시 의료계의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이 적지 않다. 나백주 을지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정부는 결국 의사 집단을 설득하지 못해서 의대 정원을 다시 원위치한다고 하고 있고, 의사 단체는 한술 더 떠서 정책을 철회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며 “의사 단체에 밀리기만 한다면 어떤 정부라도 정책 추진에 따른 부담을 크게 가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정국 혼란 속 의료개혁 흔들…“시대적 과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진 가운데 정부는 의료개혁 2차 실행방안 발표를 앞두고 있다. 복지부는 지난해 8월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 등이 담긴 1차 실행안 발표에 이어 △포괄 2차 지역병원 육성 △비급여·실손보험 개혁 △의료사고 안전망 강화 △전공의 수련 혁신 등을 포함시킨 2차 방안을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다. 노연홍 의료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은 13일 전문위원회 연석회의에서 “초고령 사회라는 경험해 보지 못한 의료 환경이 현실로 다가온 지금, 비효율적 의료전달체계를 해결하는 것은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라고 밝혔다.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 로비에 걸린 병원 홍보물 옆으로 의료진이 지나가고 있다. 곽경근 대기자

의정 갈등이 1년 넘게 지속되는 동안 정부, 의료계 할 것 없이 출혈이 컸지만, 개혁 없이 의료 환경 문제를 덮고 방치하면 미래에 더 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의사, 시민사회, 보건의료학계 모두 입을 모은다. 

박종훈 고려대안암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수도권 중심의 의료 집중 문제, 과잉 진료로 인한 부작용, 중환자 진료 기피 현상 등을 해결하기 위해 의료개혁은 꼭 필요하며 정권이 바뀌어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서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이유와 방향은 명확한데, 정부가 청사진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이어 “단순히 의대 정원 증원만으로는 의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진료전달체계 개편, 수가체계 개편 등 의료 환경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를 아울러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정책팀장은 “진료 거부, 대학 휴학이 의료계의 무기로 활용되는 상황에서 의사들이 단체로 이탈해도 병원이 문제없이 돌아가는 게 올바른 의료시스템의 모습”이라며 “이를 위해선 결국 의사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 팀장은 “의대 증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어떤 의료정책도 제대로 추진될 수 없다”면서 “공공의료를 담당하는 인력이 쉽게 이탈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서 의료 위기 상황에서도 의료체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또 의료개혁 방향에 대해선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국민들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돼야 한다”라며 “어느 당이 정권을 잡든 의료개혁은 계속돼야 하며, 특히 비급여 확대에 따라 환자들이 과도한 부담을 짊어지지 않도록 정부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의료개혁을 위해선 정부와 의료계 간 신뢰 회복이 중요하다는 진단도 나왔다. 제21대 국회의원을 지낸 신현영 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그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의료계를 적대시하는 태도를 보였고, 관계 부처 장·차관들 역시 의료계와 협력하기보다는 대립각을 세웠다”면서 “이제라도 정치권과 의료계가 협력해 차근차근 올바른 의료개혁 실행안을 마련해 나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어 강희경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정부의 필수의료 패키지에는 의사들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내용이 포함돼 있지만, 보완해야 할 점도 많다”면서 “의료개혁은 모든 이해관계자가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추진돼야 하며, 이를 위해 의료진과 국민이 함께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정부는 3차 실행방안을 마련하는 데 집중할 예정이다. 이 방안에는 △면허제도 선진화 △초고령 사회 대비 회복기 재활 및 재택의료 등 의료전달체계 확충 △필수·지역의료 중심 지불보상 구조 개혁 △미용의료 관리 강화 등의 내용이 들어간다. 정부는 ‘의료개혁 완수’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를 열고 “지난 수십 년간 누적된 지역의료와 필수의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흔들림 없이 의료개혁을 추진할 것”이라며 “모든 국민들이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개혁 완수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신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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