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있는 기성(棋聖)’으로 불린 우칭위엔(吳淸源) 9단이 설파한 바둑의 진리다. 바둑의 속성을 꿰뚫은 촌철살인의 명언을 남긴 우칭위엔 9단의 수법 중 현대에 와서 ‘AI 수법’으로 분류되는 수도 다수 있다. 인공지능 등장 이전까지 ‘우칭위엔 9단만 두는 수’라는 평가를 받은 ‘어깨짚기’ 수법이 대표적인 예시다.
바둑은 중국에서 시작돼 일본에서 문화를 꽃 피웠고, 기술적인 면과 승부에선 ‘후발 주자’인 한국이 세계 최강인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우칭위엔 9단은 중국인으로, 1914년 푸저우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일본 바둑이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던 것과 달리, 중국에는 이렇다 할 ‘바둑계’조차 없었다. 한국은 바둑이 ‘노름’ 취급을 받고 있던 무렵으로, ‘한국기원’ 설립 이전이다.
우칭위엔 9단의 기재를 알아보고 제자로 들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일생 동안 단 3명의 제자만 키운 일본 바둑의 전설 세고에 겐사쿠(瀬越憲作) 9단이다. 최근 영화 ‘승부’가 2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관심을 받고 있는데, 영화 속 ‘조훈현의 스승’으로 나온 바로 그 사람이다. 즉, 우칭위엔 9단은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의 동문 ‘사형(師兄)’이 된다. ‘대사형’이라고 할 만한 일본의 하시모토 우타로 9단이 세고에 9단의 첫 번째 제자인데, 무려 일본 관서기원의 창립자이자 초대 이사장이 되는 인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바둑계는 보수적이다. 중국에서 건너온 천재 기사가 일본 바둑의 태산거두 세고에 9단의 든든한 후원을 등에 업고 일본 바둑계에서 활개를 치는 모습을 당시 일본 기사들은 견디지 못했다. 온갖 비방과 괴롭힘이 있었고, 이를 모두 극복한 이후에는 오히려 조국 중국으로부터 ‘친일파’의 멍에까지 썼다. 그럼에도 우칭위엔 9단은 묵묵히 바둑을 두고 조화를 추구했다. 100세를 일기로 2014년 타계하기 전까지, 우칭위엔 9단은 고령에도 세계대회가 열리는 현장 곳곳을 누비며 세계 바둑계 화합을 위해 애썼다. 1988년 세계 최초로 메이저 세계바둑대회가 열리고, 이후 한·중·일 동양 삼국이 활발한 바둑 교류를 이어가게 된 배경이다.
30년 넘게 이어오던 한국과 중국의 ‘바둑 외교’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 1월 촉발된 ‘LG배 파행 사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고, 중국바둑협회는 지난 23일 LG배 불참을 선언했다. 세계 바둑 랭킹 1위 신진서 9단은 지난 2월5일 쿠키뉴스와 인터뷰([단독] ‘LG배 사태’ 의견 낸 신진서 “3국은 커제 잘못도 크다” [쿠키인터뷰])를 통해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다. 커제 9단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상황을 적확히 직시하고 있는 신 9단의 인터뷰 기사는 중국 주요 언론에 번역 게재됐다. 이 기사는 중국 바둑 팬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대립 국면으로 치닫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든 계기이기도 했다. 한국기원은 신진서 9단의 의견을 반영해 바둑룰을 개정했고, 중국은 불참했던 한국 주최 세계대회 ‘쏘팔코사놀배’에 팀을 구성해 출전하는 등 봉합 수순이 이어졌다.
하지만 LG배는 여전히 냉랭한 분위기다. 중국바둑협회는 “LG배는 불참하지만, 향후 한국에서 개최하는 다른 세계대회에는 예정대로 바둑팀을 파견할 예정”이라고 여지를 남겼다. 그러면서도 “중국바둑협회는 LG배 이후 지난 3개월 동안 한국기원과 소통을 시도했지만, 핵심 요구(판정 논란 해명, 재발 방지 등)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한국기원의 소통 부재를 꼬집었다.
한국기원은 LG배 파행 사태 직후에도, 중국이 불참을 선언한 지금도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고 ‘내부 논의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지난 1월, 중국이 LG배 시상식에 불참하고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성명까지 내면서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당시 한국기원이 아무런 입장도 내지 않고,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연휴 기간’에 돌입하면서 모든 업무를 중단하자, 한 정상급 프로기사는 쿠키뉴스에 “연휴나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아쉽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무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주리라 믿는 방식은 이제 더는 통하지 않는다.
이제 바야흐로 한국기원의 시간이다. 중국 바둑계와 소통의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책임 있는 자세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 LG배 파행으로 촉발된 한국 기사들의 중국 바둑리그 출전 불가 조치 또한 한국기원이 풀어야 할 난제다. 바둑계 관계자는 “한국 프로기사들이 중국 바둑리그(갑조리그, 을조리그, 여자리그 등)에 용병으로 출전하면서 매년 약 15억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면서 “LG배 사태 이후 올해 한국 선수들의 중국리그 진출이 좌절됐는데, 이로 인한 손실이 막대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국기원이 중국 바둑계와 ‘조화’를 이룰 ‘묘수’를 찾을 수 있을까.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 난국을 타개해나갈 방법을 찾아내기를, 더 이상 곤란하다고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인 소통에 나서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