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성장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는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풍속화와 환상적이고 다의적인 작품을 창작했다. 전해지는 브뤼헐의 작품은 45점이며, 그의 후손도 15명의 화가를 배출한 화가 집안이다. 그는 15세기의 미술과 17세기의 미술을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브뤼헐은 당시 인기있는 주제인 바벨탑을 세 번 그렸으나, 현재 두 작품만 전해진다. 하나는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는 1563년작 '바벨탑'으로, 그의 대표작이다.
다른 하나는 로테르담의 보이만스 판뵈닝언 디포(Depot Boijmans Van Beuningen, 일명 아츠 디포)에 있는 '바벨탑'으로 5년 뒤 1568년에 그린 것이다.
그는 대(大) 브뤼헐이라고 불리는 데, 이는 그의 장남도 화가였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서다. 또한 '농부 브뤼헐'로 불리기도 하는 데 그 이유는 그가 농부들의 전원생활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농부로 변장하여 어울렸기 때문이다.
브뤼헐은 종교적 소재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는 종교개혁의 시기에 태어나 종교적 충돌이 점차 커지고 반목이 날로 늘어나는 시대적인 상황에서 성장했다.
브뤼헐의 '바벨탑'에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묘사하는 통찰과 풍자 정신이 강하게 나타난다. 7층 규모로 구름이 중간에 걸쳐질 정도로 굉장히 크고 견고해 보이지만, 일층이 완공되기도 전에 전층이 함께 지어지고 있다. 그래서 그 탑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다.
빈 미술사 박물관의 '바벨탑, 1563'은 내부가 붉은색이고 외부는 노란색이다.
평소 브뤼헐이 즐겨 사용하는 색조인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따뜻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로테르담의 아츠 디포의 그림(1568)은 건물의 외부 일부가 붉은색을 띠고 있으며, 빈 미술사 박물관의 것처럼 무너져 내리지는 않는다.
바벨탑을 무너지게 그리기보다는 바벨탑의 외부를 붉게 칠했다. 전체적인 배경이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더 많이 몰려와 폭풍전야의 고요와 긴장이 느껴지도록 하여 비현실적임을 강조한다.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작에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 나부쿠두리우푸르 2세 일행과 석공들의 모습이 크게 부각되었으나 이후 작품에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숲에서 벌목하는 일꾼으로 대체되었다.
미술사가 이주헌은 이렇게 설명한다.
“바벨탑은 나선형의 통로가 감아 올라가는 방식으로, 내부는 방사선 구조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조화가 불가능하다. 억지로 만들자니 이 나선을 기준으로 거기에 수직인 문들을 만들 수밖에 없고, 그것은 건물 자체가 한쪽으로 기우는 듯 안정성을 해치게 된다. 인간의 얄팍한 지식에 대한 브뤼헐의 경고이며 그 지식에 의존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 어리석음을 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바벨탑 이야기는 성경의 창세기와 유대교의 고전 랍비 문학인 '아가다(Aggadah)'에 나온다. 이 책들은 인류가 바빌로니아 평원에 정착했던 때를 다루는데, 바로 그들이 통일된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던 시기이다.
신 바빌로니아인들은 강력한 정복자 나부쿠두리우푸르 2세(재위 기원전 604~기원전 562)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그의 자만심과 폭정은 백성들이 두려움 없이 하느님에게 대항하여 바벨탑을 쌓도록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나부쿠두리우푸르 2세는 하늘까지 닿는 탑을 건설하길 원했고, 우상을 섬기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바빌로니아인들 또한 세상에 그들의 이름을 떨치고 통일된 강대한 제국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자 여호와가 내려와 탑의 건축을 확인했고, 바빌로니아인들이 하나의 언어로 통일돼 있음으로 그들의 계획이 성사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여호와가 곧 그들의 언어를 혼동시켜 사람들을 전 세계로 퍼트리기로 했고 이후 탑 건축은 중단되었다.
바벨탑을 사막이 아닌 네덜란드의 항구도시 안트베르펜의 도시 풍경에 그려 넣은 것도 바벨탑의 어리석음이 옛날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브뤼헐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속국이었다. 당시 가장 큰 무역항인 안트베르펜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한 독립전쟁의 상대인 스페인의 필리페 2세는 합스부르크가 출신이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가에서 브뤼헐의 해학과 풍자 그리고 비판을 선호해 그의 작품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분명 그 작품의 깊이를 입증하는 것이다.
기원전 597년 3월 14일 한창 번영을 구가하던 유대교의 성지 예루살렘은 신(新) 바빌로니아 제국의 나부쿠두리우푸르 2세가 이끄는 대병력 앞에 초토화되고 말았다. 성지는 폐허가 됐고 수많은 성물(聖物)이 정복자에 의해 약탈됐다.
이때 유대인 수천 명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 幽囚)'라 한다. 그들은 여태껏 본 적 없는 거대한 탑을 목격했다.
평지만 보고 살던 유목민족인 유대인들이 바벨탑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경천동지한 일이었으며, 구름 위로 치솟은 탑은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길 같았다.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목격담은 이후 예루살렘으로 전해져 훗날 성서의 편찬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성지를 파괴한 바빌로니아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야만인으로 묘사되었고 바벨탑은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오만과 탐욕의 상징으로 대변된다.
9.11사태를 보고 필자는 이 그림이 떠올랐다. 쌍둥이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영상이 TV에서 계속 재생되는 걸 보며 전 세계는 아연실색 충격을 받았다. 미국의 오만과 탐욕의 상징인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무너뜨린 오사마 빈 라덴은 자신이 신을 대리하여 미국을 단죄하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리라.
그래서 당시에 새뮤얼 P. 헌딩턴(Samuel P. Huntington)의 ‘문명의 충돌론(Clash of Civilization)’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가 생각하는 문명의 충돌론의 근간에는 뿌리 깊은 종교 갈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브뤼헐 이후, 바벨탑은 무지한 민중을 계몽하고 경고하기 위한 유럽인의 시각에서 보는 기독교 회화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바벨탑의 형태는 화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되었지만 대체로 하늘로 높이 치솟은 원추형이었다.
그러나 최근 메소포타미아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바벨탑은 원추형이 아니라 피라미드형이었음이 밝혀졌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거대한 계단형 탑으로 '지구라트(Ziggurat)'라는 성탑(聖塔)이 있었다. ‘지구라트’ '높은 곳'이란 의미이다. 이는 하늘에 있는 신들과 지상을 연결시키기 위한 것으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로 '바빌로니아의 지구라트'를 가리킨다.
지구라트는 수메르 시대 초기 신전의 기단에서 발달하였는데, 그 전형적인 형식은 점점 작아지는 사각형의 테라스를 겹쳐 기단으로 하고 그 최상부에 직사각형 신전을 안치한 형태이다. 벽돌을 쌓아 평면이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의 단을 3~5장 겹치고, 최상단에서 다시 계단으로 오르는 신전이 설계되어 있었다.
지구라트는 신성한 탑과 신전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도시의 중심부에 있다.
지구라트는 진흙을 구어 만들었기에 돌로 만든 피라미드보다 물에 취약하다. 그래서 건조한 기후이지만 비가 오면 점점 녹아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천연의 아스팔트에서 추출한 흑갈색이나 갈색의 타르 같은 물질을 벽돌에 발랐다.
그 흔적이 지금도 검은색으로 남아 있다. 기원전부터 이 지역에서는 석유를 이용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지구라트는 메소포타미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페르시아 등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도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거의 대부분 무너져버려서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1922년 발견된 우르의 지구라트 뿐이다.
확실한 것은 바벨탑은 지구라트였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20편으로 이어집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