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었던 통화긴축의 시대가 3년2개월만에 종료됐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25%p 인하하면서 침체됐던 내수경제를 살리기 위한 피벗(통화정책 전환)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시장의 움직임은 미온적인 상황이다. 가계대출 관리·강화 기조가 여전히 유지되다 보니 유동성은 연말은 되야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기준금리 0.25%p 인하…한은 “가계대출 이자부담 연간 3조 줄어들 것”
11일 한국은행은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0.25%p 인하한다고 밝혔다. 금통위는 지난해 1월 0.25%p 인상을 마지막으로 같은 해 2월부터 올해 8월까지 총 13회 연속 기준금리를 3.5%로 동결한 뒤 38개월만에 통화정책 완화로 돌아섰다.
한은은 통화정책방향결정문을 통해 “물가상승률이 뚜렷한 안정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거시건전성정책 강화로 가계부채 증가세가 둔화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외환시장 리스크도 다소 완화된 만큼 통화정책의 긴축 정도를 소폭 축소하고 그 영향을 점검해 나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기준금리 인하 배경을 설명했다.
또한 한은은 기준금리 인하로 고금리 시기 늘어난 대출 이자를 감당해야 했던 대출자들의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은에 따르면 대출 금리가 기준금리 인하 폭만큼만 떨어지더라도, 가계대출자의 이자 부담은 연간 3조원가량 줄어들 것으로 추정된다.
부동산·증권시장 영향은 미미…“연말까지 변동흐름 크지 않아”
이처럼 긴 동결기간 이후 들어간 통화완화 정책이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시장의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일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우선 부동산의 경우 기준금리 인하로 대출 금리가 낮아지면 통상 부동산 가격이 올라간다. 하지만 시장 금리가 연초부터 하락해 이미 투자 심리에 상당 부분 반영된 데다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2단계 시행을 비롯한 대출 제한 영향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함영진 우리은행 부동산리서치랩장은 “금융권의 주택담보대출과 입주장의 갭투자 관련 전세대출 문턱이 높아지며 기준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주택 거래 총량과 매매가 상승 움직임은 둔화할 양상이 커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어 “연내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어진 집값 상승 피로감 누적으로 주택 매매거래 월별 총량은 7월을 정점으로 8월부터 주춤한 상태”라며 “연말까지 이와 같은 흐름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국내 증권시장도 마찬가지다. 오전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내렸으나 증시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코스피 지수는 장 초반 전거래일대비 12.86p(0.49%) 오른 2612.02로 출발해 장 초반 2620대로 올라섰지만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코스닥 지수도 오후들어 하락 전환하면서 4.50p(0.58%) 내린 770.98에 거래를 마쳤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수석연구위원은 “이미 예정된 금리 인하라 선반영되면서 시장에 미치는 영향 자체는 크지 않을 것”이라며 “채권금리는 기준금리 보다 많이 낮은데 기준금리가 몇 번 더 내려 시장 금리와 격차를 줄여야 실제 실물에 영향이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추가 인하는 언제…한은의 신중론에 ‘내년으로’
기준금리 인하가 당장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인 만큼 추가적인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 하지만 한국은행에서는 기준금리 추가 인하를 두고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기준금리 인하 직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추가 금리 인하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중립 수준으로 안 내려가면 성장률이 2%보다 낮게 된다”며 “금리가 중립보다 높았던 것은 인플레이션을 떨어뜨리기 위해 경기를 희생하더라도 긴축 수준을 유지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총재는 기준금리 인하를 미국처럼 할 수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총재는 “미국은 인플레이션이 10% 이상 올랐고 금리를 5%p 이상 높였다”며 “그러니 금리 인하 속도가 빠른 건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는 금리를 3% 올렸다”며 “우리도 0.5%p 떨어지겠구나, 돈 빌려도 문제없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금융시장 전문가들도 연내 추가 기준금리 인하는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김성수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번 금리 인하의 가장 큰 근거는 상황이 반전돼서가 아니라 인하하지 않고는 금융 안정에 끼칠 영향을 알 수 없다는 것”이라며 “한은이 추가 인하가 빠르게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내년 부터 분기당 0.25%p씩 인하할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류진이 SK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금융 안정이 여전히 주요 변수”라며 “인하 속도는 가계부채 증가세를 자극하지 않도록 내년 3분기까지 분기당 0.25%p씩 점진적으로 인하해 내년 3분기 중립금리 수준인 연 2.5%에 도달할 전망”이라고 바라봤다.
박석길 JP모건 이코노미스트도 내년 1·2분기(1·4월쯤)에 분기별 0.25%p씩의 인하를 전망했다. 그는 “한은의 후속 결정은 금융안정 등 정책 목표 간의 상충 관계를 고려해 신중하게 내려질 것”이라며 “되레 중립적인 입장에서 더욱 조심스러운 선택을 해나갈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