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초등학생 때 이른바 보수적 교회에 다녔고, 중고등학생 시절엔 교회와 도서관만 오가는 모범생이었다. 유신시대에 대학 시절을 보내면서는 신앙과 현실정치의 이념 사이에서 많은 방황을 했다. 평소 배운 보수적 신앙과 사회과학 서클에서 새로 배우는 진보적 이념을 조화시키기 어려웠고, 기독교 장로교회에 다니며 현대신학을 기웃거리며 절충해 보고자 했다.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 같은 책을 가지고 토론했던 기억도 난다. ‘미쇼 다이(Missio Dei :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쓴 글도 빛바랜 원고로 남아 있다.
개인적인 오랜 신앙생활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세속적 이념과 신앙·종교 사이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탄핵을 둘러싼 치열한 갈등상태에 놓여있다. 과거의 여러 갈등과 다른 것은 그 선두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정치화’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극우화’라는 표현도 있지만, 전체 교회의 모습이 아니기에 ‘일부 교회의 극(極)보수 정치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비판 내지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학자의 시각에서 그것의 양면성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교회가 정치성이나 사회성을 갖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최근의 현상은 단순히 정치성을 갖는 것과는 다르다. 기성 보수정당도 하지 못했던 계엄의 옹호와 탄핵 반대라는 정치운동에 교회가 서 있다. 탄핵반대 집회는 개신교 예배 형식으로 진행되며,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휘날린다. 문제는, 정치의 선봉에 서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또 교회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다.
도피처이자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한국교회
나의 대학 시절, 독재 치하에서 안기부와 경찰의 감시 속에 교회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우산’이었다. 젊은 우리는 교회에서 심신의 위안을 얻으며 교회를 개혁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돌이켜보면 일제 치하에서도 그랬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교회는 항일 독립운동의 중요한 축이었다. 억압받던 조선 민중에게 교회는 억압받는 자와 소외된 자들의 안식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대한민국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로 자리매김하면서 교회의 성장은 가속화됐다. 일종의 후진국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한국에게 기독교란 저항의 안식처임과 동시에 발전된 선진국의 ‘근대성’의 표상처럼 인식됐다. 성탄절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1949년이다. 석가탄신일이 1975년에야 공휴일이 된 것과 비교하면 당시 한국 기독교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는 선진국을 지향하는 국가권력의 ‘지배적 종교’이자, 권위주의에 맞서는 ‘저항적 종교’였다. 교회의 성장에는 ‘양수겸장’이 되었던 셈이다.
조화를 깨는 극단성, 성장에는 치명적
최근에는 다르다. 일부이지만, ‘정치적 (극)보수주의’의 핵심에 ‘기독교 (극)보수주의’가 자리해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비상계엄 주도자들에게서 드러나는 ‘무속적 성격’에 대해서도 비판하지 않는다. 비상계엄 주도세력과의 정치적·이념적 일체성이 신앙을 압도하는 형국이다.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정치공동체가 되는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광화문 광장에 선 전광훈 목사를 떠올려보자. 일각에서 그는 ‘이단’ 취급을 받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과잉’ 대표 되는 면도 있으나, 그가 표방하는 기독교의 이미지가 많은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교회의 보수화에 80년대 이후 민주화 시대를 풍미한 ‘진보적 세계관’의 폐쇄성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진보의 세계관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실의 틈을 뉴라이트 이념이 파고들었고, 그것이 보수적 기독교와 결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맥락에도 ‘일부’ 교회의 ‘극단’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지금과 같은 모습이 장기화되면, 교회 안에서 정치적으로 진보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퇴거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성장에 매우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일제강점기나 독재체제 아래의 ‘절묘한 배합’이 파괴되고, 국민들 사이에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위상에도 흠이 생긴다. 개신교 신자 수가 감소하는 요즘의 추세를 생각하면 더욱 치명적일 수 있다.
복잡성에 대응하는 미래지향적 리더십
더욱 걱정되는 것은, 보수적인 정치관이 종교의 신념이 될 때 우리 사회가 공존과 타협보다는 갈등과 극단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위기감이다. 그나마 ‘적대적 진영정치’의 그늘이 심해져가고 있는데, 잘못하면 고착될 우려가 있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더하기와 빼기만 가지고도 설명할 수 있던 시대를 지나, 미적분과 온갖 공식을 대입해도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국제질서에서 더욱 그렇다. 동아시아의 급격한 정세 변화와 지구촌화의 부정적 효과에 반발하는 트럼프식 ‘자국 우선주의’는 쉽지 않은 난제다.
이러한 복잡성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래지향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미래의 지도자는 유연한 인식과 복잡성에 대처할 수 있는 사려 깊은 지혜를 가져야 한다. 탄핵 반대 기독교 집회에서 외쳐지는 극단적 인식, ‘반중 혐오’와 ‘빨갱이 몰이’에 익숙해진 미래세대가 언젠가 한국사회의 주역이 되었을 때 우리는 과연 안심할 수 있을까. 신앙이 곧 정치적 견해가 된다면, 다름의 가능성을 배척하는 ‘도그마’는 신학이 아닌 정치에서 관철될 것이다. 태도는 경직되고 본질주의는 강화되는 문제점이 생기는 것이다.
부메랑을 막기 위한 노력
우리는 대개 하나의 견해, 생각, 가치를 유일한 정답이라 여기곤 한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 보니,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일면성에 가려져 있던 쟁점들이 드러나면서 나의 일면성이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경우를 적지 않게 경험했다. 오늘날 ‘일부’ 교회의 극보수적 입장과 행동이 언젠가 한국교회 전체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우려가 현실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개인과 집단의 정치활동을 분리하자. 신자 개인은 정치적 권리를 갖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가 ‘독주’하는 방식으로 교회 전체가 집단적 정치활동을 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보수뿐 아니라 진보에도 마찬가지다. 극단적 대립의 영역에 집단적으로 개입한다면 교회는 특정 정치세력만을 대표하게 된다.
둘째, 정치적 견해를 나눌 때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자. 이전에 신앙생활을 같이했던 김천 추수교회 김영근 목사가 설교 동영상을 보내왔는데, “찬송가를 1절만 부를 때가 많은 것처럼, 정치 이야기를 할 때는 상대방을 존중하며 1절만 이야기 하자”는 설교였다. 논쟁이 심화되면 의견 차이를 넘어 인격과 인간성을 따지게 되고, 중재할 수 있는 선을 넘어버린다. 1절만 말하는 것은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것이며, 서로에게 치명상은 남기지 않고 화해의 여지를 두는 것이다.
관용과 다원성의 공간이 되기를
나는 탄핵 국면이 ‘대통령의 극단화’로 발생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윤석열의 전광훈화’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이자 한국교회의 위기다. 관용이 사라지고, ‘적대적 진영 정치’와 갈등이 확산하는 추세다. 이래서는 안 된다. 미래를 위해서는 다원성과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사생결단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극단적 의견이 있더라도 넓은 중간 지대를 놓고, 상호 존중하는 다원적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얼마 전 이영훈 목사가 “편 가르기는 망국병이며, 헌재가 탄핵에 어떤 결정을 내리든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 적 있다. 어느 한 편을 든 것이 아닌 포용적이고 합리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여러 목사들에게 “공산주의자냐”고 따지는 전화가 쏟아졌다고 한다. 나는 교회가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가 특정 정치적 이념에 경도되지 않고, 기독교적 정신에 기초하여 관용과 존중과 도덕적 배려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시대의 굴곡마다 칼끝이 아닌 요람이자 안식처가 되었던 교회의 모습을 오늘날의 갈등에도 기대해 본다.